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키 Oct 14. 2023

책과 마이크

질긴 나의 언어

결별이 나의 키워드인 것 같다고, 몇달 전 상담사는 말했다. 끝까지 갈등하지 않고 중간에 끊어버리는 패턴이라 했다. 이틀만에 내린 판단이었다. 과거의 몇몇 관계와 일에 대해 이야기했었다. 깨닫고 수긍되기도 했지만 지나고나니 조금 억울하기도 하다.


책과 마이크가 삶에 들어온 건 우연이다. 두 가지를 함께 이야기하는 이유는 내 안에서 둘이 밀착된 채 이어져 왔기 때문이다. 스물일곱의 봄, 창락이가 학교에서 만난 사람들을 소개했다. 책읽는라디오라는 팟캐스트를 만들고 있다며 함께하자고 했다. 그렇게 시작된 인연과 활동은 10년 가까이 계속되었다. 좋은 사람들과 좋은 시절을 보냈다. 그 시절 덕에 돈 버는 일과 따뜻한 커뮤니티도 얻었다. 


사실 나는 다독가나 애서가가 아니었다. 지금도 그런 편이다. 세상에는 책을 쉼 없이 읽는 사람들과 책이라는 매체를 광적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내게 책은 메시지를 담은 여러 형태의 그릇 중 하나다. 물성이나 방식보다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냐가 더 중요하다. 팟캐스트를 즐겨 만들어왔던 것도 책 자체보다 그 안의 메시지를 통해 나의 이야기를 전할 수 있어서였다. 목소리와 말이 내가 가진 무기이기도 했다. 


다만 그러다보니 책과 마이크는 현실의 일이자 관계로서 점차 더 깊이 스며들었다. 오프라인 서점과 온라인 서점에서 일을 하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여러 일터에서 팟캐스트와 관련된 일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두 가지 언어에 점점 더 강한 애착을 느꼈다. 


연속된 시련의 시작도 책과 이어져있다. 애정을 담아 일하던 오프라인 서점에서였다. 가진 재능을 발휘할 수 있었고 좋은 동료와 연인도 만난 일터였다. 입사하자마자 대기업에 합병이 되었는데 화려한 겉모습과 달리 매출은 다소 부진했고 대기업 서점 사업 제한이라는 리스크도 있어 몇 년 후 다른 회사에 넘겨졌다. 새로운 대표는 의도적으로 모든 결재와 결제를 막았고 결국 모든 구성원이 줄지어 퇴사했다. 결혼식을 올린지 몇 달 뒤였다. 코로나19 확진자는 폭증하기 시작했다. 


일은 쉽게 구해지지 않았고 막막한 날들을 견뎌야 했다. 끊었던 우울증 약을 다시 먹기 시작했다. 신혼의 달콤함보다는 걱정과 불안이 더 컸다. 나약하고 성숙하지 못한 모습도 드러냈다.  


고마운 동료를 통해 다행히 새 직장을 얻었다. 엔터테인먼트사의 라이브러리를 꾸리는 북큐레이터였다. 하지만 급성장한 탓에 혼란스러운 회사 체계와 견디기 힘든 사람 덕에 금방 관두었고, 운 좋게 온라인 서점에 둥지를 틀었다. 책 팟캐스트 담당자였다. 그렇게 또 나의 일은 이어졌다. 


작년 말부터 조금씩 끈은 약해졌다. 브랜드 기획자로 직무가 바뀌었다. 회사의 리브랜딩과 광고 프로젝트를 맡았다. 그리고 올 여름, 아예 책이 아닌 공간 및 브랜드 컨설팅 회사로 옮겼다. 이 집에 얽힌 고통과 고난은 지속됐지만 한편으로는 일에 몰입하며 성취도 얻고 이직도 했다. 사람들은 이 지점을 신기해 한다. 하지만 내게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집에서는 울거나 술에 취해 있거나 사건 관련 문서를 만들었지만 회사에서는 일을 했다. 앞에도 말한 것처럼 인생은 단순하지 않은 것이다.


우습게도, 현재 일터에서 여러 프로젝트를 하며 여전히 책을 끌어온다. 책에서 레퍼런스를 찾고, 책을 통해 리서치를 하고, 책에서 얻은 인사이트를 바탕으로 기획을 하고 있다. 그게 나의 차별점이기도 할 테다. 그리고 출퇴근 길에, 저녁에, 주말에 계속 책을 읽는다. 


작년 여름에는 홀로 만들고 진행하는 책 팟캐스트도 시작했었다. 하지만 그건 지속하지 못했다. 난리통에 중단하여 마이크에는 누룽지 털만 달라붙고 있다. 사람에게 그 정도까지의 여력은 없는가 싶다. 


집에 있을 때 안정과 에너지를 회복하고, 슬픔과 우울을 다독이며 말할 수 있는 때가 오면 다시 팟캐스트도 시작할지 모른다. 그래도 이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이 좋은 신호 아닐까.



* 사기 인지 후 1년. 지급 명령, 임차권 등기, 전세 사기 피해자 결정. 잠시 머무는 곳에서 오래 살아야 하는 장소가 된 이후, 비로소 집과 동네에 대한 관찰과 사랑을 시작하는 이야기입니다.

이전 03화 캠핑 랙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