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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키 Oct 12. 2023

캠핑 랙

광기 어린 소비의 잔해

짧은 결혼 생활에 대해서는 되도록 말을 아끼고 싶다. 더러 행복한 순간들도 있었다. 분명한 건 시작도 끝도 나름 최선의 선택이라 여겼다는 것이다. 


물론 시작처럼 마무리도 조금 성급했다. 끝내기로 합의한 후에 같이 생활하는 건 괴로운 일이었다. 분가부터 빠르게 하고 나머지를 처리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많은 대가를 치러야 했다. 


혼자 살 집을 알아보고 이사까지 하는 데 대략 한 달이 걸렸다. 인근에 친구가 살기는 했지만 인천 검암동은 낯선 동네였고 돌아보면 계약부터 이사까지 모든 과정이, 그리고 그 과정에 스친 모든 사람들이 기이했다. 많은 것들이 불행의 전조였다. 하지만 일종의 심신미약처럼 판단력을 상실한 상태였을 거라는 이야기를 나중에 들었다. 이사 얘기는 길어질 수밖에 없기에 이후에 따로 적겠다.


아무튼 한바탕 소동을 치른 후 겨우 이 집에 들어왔다. 몇 주가 지나서야 가족들에게 이별 소식을 전했다. 예상대로 후폭풍이 거셌다. 부모님의 슬픔과 이유 없는 자책을 마주하는 것은 특히 고역이었다. 


그래도 시간은 계속 흘러갔다. 별일 없던듯 회사를 다니고 밥도 먹고 잠도 잤다. 간만에 홀로 지내는 삶이 즐겁기도 했다. 나름의 행복을 찾아보려 했다. 


한 달 정도 지났을 무렵, 가슴에 공허가 가득한 기분이 들었다. 


그 공허감을 채워준 것은 바로 캠핑이었다. 아니, 캠핑 장비 소비였다. 어느 날 밤 문득 텐트를 검색하기 시작했고, 밤을 꼴딱 새며 비싼 장비들을 마구 사기 시작했다. 스노우픽이니 헬리녹스니 하는 브랜드들을 알게 되었고, 큰 장비부터 사소한 장비까지 나사 빠진 사람처럼 카드를 긁었다. 


당연히 가진 돈은 없었다. 가졌던 푼돈과 전 직장 퇴직금 등은 결혼 준비와 생활하는 데 모두 썼고, 혼자 분가하며 오히려 대출까지 받았다. 그런데도 추가로 마이너스 통장을 뚫었다. 대출로 캠핑 장비를 사는 사람이 또 있을까? 현재만 즐기면 되니, 인생 그냥 될대로 되라는 마음이었던 것 같다. 그 후에 뭐가 또 올지 모르고. 


사정을 아는 친구 창락이는 나를 위로하면서도 광기 같다고 했다. 맞다. 그건 광기였다. 


캠핑은 딱 세 번 갔다. 두 번은 혼자, 한 번은 가족들이랑. 혼자 세팅하고 철수하는 데 반나절이 걸렸고 다녀오면 녹초가 되었다. 캠핑장에서의 심심함은 견디기 힘들 정도였다. 인스타그램만 열심히 올렸다. 


등유 난로와 시율이용 유아 캠핑 의자는 당근 마켓으로 팔았다. 나머지는 언젠가 또 쓸 거라고 생각하며 갖고 있다. 가끔 랙에 있는 물건들을 보면 뽀얀 먼지가 쌓여 있다. 바로 곁에 누룽지 화장실이 있어서 그럴 거다. 손으로 대충 터는 시늉을 하고, 얼른 시선을 거둔다. 



* 사기 인지 후 1년. 지급 명령, 임차권 등기, 전세 사기 피해자 결정. 잠시 머무는 곳에서 오래 살아야 하는 장소가 된 이후, 비로소 집과 동네에 대한 관찰과 사랑을 시작하는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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