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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키 Oct 15. 2023

이 집을 선택한 이유

집을 고르는 각자의 기준이 있겠지만 내게 1순위는 창이다. 창은 커야 하고 그 안의 뷰는 최소한 밉지 않았으면 좋겠다. 다른 조건은 크게 중요치 않다. 이 간단한 기준을 충족하는 집을 찾는 건 쉽지 않다. 


첫 독립은 서른 셋에 했다. 공덕역 근처 6평 오피스텔을 전세 1억으로 구했다. 버팀목전세자금대출로 7천 만원을 대출받고 아버지에게 3천 만원을 융통했다. 이 돈으로 결혼까지 할 수 있었다. 다행이고 감사한 행운으로 여긴다. 


6평은 비좁았지만 벽 전체를 덮는 커다란 통창으로 도심과 하늘이 보였다. 바로 계약을 결심했다. 처음으로 혼자 살게 된 집에서 여러 로망을 이뤘다. 공간을 빈틈없이 활용하여 내 취향의 물건을 채웠다. 친구들과 다닥다닥 모여앉아 파티를 했고, 스탠드 조명을 켜고 창밖을 보며 책을 읽었다. 애틋한 연애도 했다. 얼마 후 파트너의 집에서 강아지와 함께 셋이 살게 되었다. 


2년 후, 다시 혼자 살 집을 찾아야 했다. 원룸으로 돌아가기는 싫었다. 하지만 가용 가능한 예산으로 서울에서는 어려웠다. 서점 옛 동료 상희님이 사는 인천 계양구가 떠올랐다. 근처 시세를 찾아보니 같은 예산으로도 쓰리룸이 가능했다. 당시 회사가 있던 여의도는 9호선 라인이었는데 김포공항역에서 공항철도로 환승하면 인천으로 이어졌다. 


상희님이 알려준 부동산에 연락했다. 계양쪽에는 전세 매물이 없다고 했다. 부동산 플랫폼에는 뭐가 뜬다고 대꾸했더니 그런 건 너무 믿지 말라고 했다. 그 말을 새겨들었어야 했다.  


어플로 연결된 중개보조원은 차에 나를 태워 근처 여기저기를 보여주었다. 예산을 초과하거나 집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지역 범위가 조금씩 넓어졌다. 공항철도 계양역 다음이 검암역이라며 그 쪽으로 이동했다. 


10년 정도 돼 보이는 빌라였다. 높은 차가 들어오려다 받았는지 주차장 입구 윗부분이 조금 부서져 있었다. 파손된 틈으로 스티로폼 단열재가 드러나 보였다. 엘리베이터는 없었다. 꼭대기인 4층까지 올라갔다. 


초인종을 누르자 내 나이 또래 여성이 문을 열어줬다. 거실 바닥에 앉아있던 어린 여자 아이 둘이 날 보더니 까르르 웃으며 방으로 도망쳤다.


커다란 통창이 보였다. 창밖으로 큰 나무들과 하늘이 보였다. 흐린 날인데도 어둡지 않았다. 가로수와 이차로를 바로 면하고 있었다. 작고 조용한 동네의 따뜻한 분위기가 전해졌다. 답답하고 조급했던 마음이 뻥 뚫렸다. 거주하던 가족의 분위기도 단란해 보였다. 


어차피 잠깐 살 집인데 이 정도면 감지덕지지. 


웬만한 조건은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곰팡이나 수압 정도만 확인하고 나왔다. 쓰리룸인데도 전세가는 저렴한 편이었고 근저당도 깨끗했다. HUG 안심전세대출이 보증금의 90%까지 된다고 했다. 거주자는 집주인이었다. 이보다 만족스러울 수 없었다. 거기까지가 딱 좋았다. 


여전히 이 집의 창은 자랑거리라 생각한다. 매일 아침 커튼을 열어젖히며 하루를 시작한다. 계절마다, 아니 날마다 다른 결의 빛이 들어오고, 다른 색깔의 하늘과 다른 모습의 나무가 펼쳐진다. 바람이 불면 나뭇잎이 사르륵 스치는 소리가 들린다. 나무에는 새들도 자주 찾아온다. 누룽지가 없을 때는 에어컨 실외기 위에 새들이 편히 앉아 쉬기도 했다.  


이제 이 창은 나의 창이다. 앞으로 오래 바라보아야 한다. 나와 비슷한 일을 겪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들에게 크나큰 빚을 졌다. 그들의 죽음으로 인하여 전세사기특별법이 통과되었다. 법이라는 것이 그렇게 서둘러 생겨날 수 있는 것인지 처음 알았다. 근본적 구제책은 당연히 아니다. 다만 이 집을 내가 우선 매수할 수 있는 권한이 생겼다. 이 역시 다행이고 감사한 행운으로 여길 수 있기를.


요즘은 주말에도 집에 오래 머문다. 가을이라 어느 때보다 나무의 색이 아름답다.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도 다채롭다. 창밖을 한참 들여다본다. 



* 사기 인지 후 1년. 지급 명령, 임차권 등기, 전세 사기 피해자 결정. 잠시 머무는 곳에서 오래 살아야 하는 장소가 된 이후, 비로소 집과 동네에 대한 관찰과 사랑을 시작하는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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