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키 Oct 17. 2023

맨홀

얼마나 강하게 키우려고

맨홀에 빠진 적이 있다. 은유가 아닌 실제다. 빌라 앞에서 배수로 뚜껑을 밟았다. 경첩이 부러져 있었다. 뚜껑이 뒤집어지며 오른 다리가 빠졌다. 모서리가 무릎 옆을 강하게 찍었다. 몸은 바닥에 고꾸라졌다.


아직도 스마트워치가 없는 사람이 있다면 꼭 장만하기를. 내동댕이쳐진 손목에서 애플워치가 부르르 울었다. 


"방금 크게 넘어지신 것 같은데 구급차를 부를까요?"


황급히 다리를 빼고 몸을 일으켜 보았다. 생각보다는 잘 움직여졌다. 어디가 부러진 건 아니군. 절뚝이며 4층까지 계단을 올랐다. 집에 들어와 바로 이불 위로 쓰러졌다. 


이 집에 온 이후 서서히 체중이 증가했다. 그래도 작년 가을까지는 견딜 만한데 그 이후로는 내가 찍힌 사진을 모조리 지우고 싶다. 최근에 3년 전 모습을 봤다가 깜짝 놀랐다. 지금과 너무 다른 체격과 인상이다. 


이유는 하나, 술이다. 맥주, 위스키, 와인 정도였다가 작년부터는 혼자 소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술만 마시면 차라리 낫다. 몸에 알콜이 들어온 순간 미친듯이 식욕이 올랐다. 배가 찢어질 때까지 무언가를 먹어야만 했다. 


우울증 약의 부작용인가 싶어 자의적으로 단약을 한 적도 있다. 한 달 뒤쯤 숨도 제대로 못 쉬는 채 병원에 가서 진선생(혼자 그렇게 부른다)에게 혼이 났다. 이 약에는 그런 부작용 없다고 했다. 술 줄이고 운동을 하라 했다. 말이 쉽죠.


그날도 월요일부터 소주를 마셨다. 술 좋아하는 같은 팀 동료와 월요주 모임이란 걸 만들었다. 취해서 집 앞까지 와서 배수로 뚜껑을 밟은 것이다. 그러고는 별일 아닌 듯 잠에 들었다. 


다음 날 일어나니 오른쪽 다리 전체가 시커멨다. 무릎 옆은 풍선처럼 부풀어 있었다. 오른 다리는 움직여지지 않았다. 회사에 먼저 알렸다. 나를 믿는 본부장 덕에 재택 근무로 전환되었다. 네발로 기는 듯 겨우 택시를 타고 병원에 갔다. 나이 든 의사는 피곤한 표정으로 말했다.


"뼈가 안 다쳐서 다행이네요. 그냥 심한 타박이에요. 병원에서 해줄 수 있는 건 없어요."


그 뒤로 물리치료와 침술을 받으며 몇 달 고생을 했다. 아직도 오른 무릎 옆은 파랗다. 


요즘에는 친구들과 농담을 나눌 정도로 내 상황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회사 얘기도, 혼자 된 얘기도, 맨홀 얘기도, 그리고 집 얘기도 슬쩍 웃으면서 나눈다. 나이 든 의사처럼 말한다. 뼈가 안 다쳐서 다행이라고. 그냥 심한 타박이라고. 시간이 흐르게 두는 것 말고는 딱히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능청스럽게 덧붙인다.


세상이 나를 얼마나 강하게 키우려고.


올해 부모님 생신 선물은 갤럭시 워치를 해드렸다. 


이제 혼술은 하지 않으려고 노력 중이다. 운동도 열심히 하고 있다. 



* 사기 인지 후 1년. 지급 명령, 임차권 등기, 전세 사기 피해자 결정. 잠시 머무는 곳에서 오래 살아야 하는 장소가 된 이후, 비로소 집과 동네에 대한 관찰과 사랑을 시작하는 이야기입니다.

이전 06화 단톡방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