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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키 Oct 18. 2023

승학로

이 길 위의 집들

창밖에 놓인 길이 승학로다. 검암동을 관통하는 길이다. 왕복 네 개 차선의 소박한 길 양 옆으로 고만고만한 높이의 주택과 상점들이 있다. 작고 아담한 동네의 중심이다. 이 길로 운동을 다니고 출퇴근을 하고 식당이나 병원이나 편의점에 간다. 내 생활의 줄기인 셈이다. 


올해 들어 길 건너에 메가커피와 빽다방이 생겼다. 그 전에는 동네 카페 하나만 있었다. 메가커피와 빽다방은 지금 한국에서 웬만큼 사람이 모이는 곳이면 어디에나 생긴다. 독특하고 개성 있는 카페를 좋아하지만, 집 앞에 두 카페가 생겼을 때 동네가 살아나는 것 같아 기쁘고 안심이 되었다.


나에게 3순위로 보상금을 주었던 옆 건물에는 오피스 겸 상가가 들어섰다. 몇 달 전 커다란 CU가 입점했다. 바로 곁에 크고 깨끗한 편의점이 생겼을 때 정말 기분이 좋았다. 살 것도 없으면서 괜히 하루에 두세 번 들렀다. 조카에게 자랑도 했다. 아직 공실이 보여 마음이 쓰인다. 임대 스티커가 얼른 떼어지기를 내 일처럼 빈다. 


편의점을 지나면 짧은 횡단보도가 있다. 신호등이 없어 차와 사람이 종종 눈치를 보는 곳이다. 매일 아침 노란 조끼를 입은 여성들이 보행을 통제한다. 한 블럭 더 가면 초등학교가 있고 어린 학생들이 그 길을 건너기 때문이다. 통학하는 아이들을 보면 쓸데없이 마음이 아린다. 출근 시간이 늦고 아침에 운동하는 나는 추리닝 바람으로 함께 길을 건너곤 한다. 


이 길 위의 집들 중 나와 같은 피해를 당한 곳이 있을까? 


이런 생각을 자주 한다. 등기부등본에서 공동 담보로 묶인 수많은 집들의 목록을 봤었다. 주소는 서울, 인천, 부천 등 다양했지만 대개는 작은 동네의 빌라들이었다. 전세 보증금도 비슷했을 것이다. 왜 이런 집들이 타겟이 되었을까. 혹 이런 집이, 이런 집의 세입자가, 이런 집 속의 삶이 우습고 만만했던 걸까. 무너져도 괜찮은 삶이었던 걸까.  


동네를 걸으며 사람들을, 집들을 둘러본다. 마음은 더욱 복잡해진다. 피해를 입은 곳이 없다면 다행일테지만 왠지 나만 어리석은 일을 당한 것 같아 속이 쓰리다. 피해를 입은 집들이 있다면, 나보다 난처한 상황일까봐 마음이 괴롭다. 그래도 나는 스스로와 룽지만 책임지면 되지만 부양해야 할 가족이 있다면?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이 있다면? 상상만 해도 가슴이 꽉 막힌다.


지난 주말에는 세 시간을 걸었다. 승학로를 따라 아라뱃길까지 걸었다. 아라뱃길을 따라 계양역까지 걸었다. 많은 집을, 사람을 스쳤다. 주제넘게 모두의 행복을 빌었다. 



* 사기 인지 후 1년. 지급 명령, 임차권 등기, 전세 사기 피해자 결정. 잠시 머무는 곳에서 오래 살아야 하는 장소가 된 이후, 비로소 집과 동네에 대한 관찰과 사랑을 시작하는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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