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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키 Oct 20. 2023

메타세콰이어

사라질 전설들

사라졌거나 사라질 것을 그리워하고 감정 이입하는 성향을 이르는 말이 독일어에는 있을까? 어린 시절부터 그런 것들 앞에 마음이 쓸쓸해지거나 슬퍼지곤 했다. 사라진 식당, 사라진 극장, 사라진 건물, 사라진 집. 사라짐을 받아들이기 어려워서 과거를 되새기거나 흔적을 더듬었다. 곧 사라질 극장에 카메라를 들고 가서 사소한 기억의 조각들을 기록하기도 했다. 


본가 근처에는 둔촌주공아파트가 있었다. 친지들이 살던 곳이기도 했다. 그곳을 기록하는 "안녕, 둔촌주공아파트" 프로젝트를 알게 되었을 때 세상에 나와 비슷한 성향의 사람이, 아니 나보다 훨씬 집요한 성향의 사람이 있구나 싶었다. 그래서 마치 팬처럼 그를 따라다녔다. 지금은 가까운 동료이자 친구가 되었다. 


공공주택지구 공터에는 신비로운 숲이 하나 있다. 거대한 메타세콰이어 나무들의 행렬이다. 빈 땅 위에 기이한 존재감을 한가득 드러낸다. 처음 공터 앞에 섰을 때 내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바로 그 숲이었다. 전설 같은 이야기가 숨어있을 것만 같은 신비함이다. 물론 그 이야기는 곧 사라지겠지만.


지난 추석 연휴에 나는 홀로 숲을 찾았다. 금지된 구역에 들어서는 두려움과 긴장이 있었다. 멀리서 보아도 위용을 뽐내던 숲은 가까이서 보니 더욱 웅장했다. 바람이 불자 세차게 흔들리며 자신의 존재를 알리듯 커다란 소리를 냈다. 숲 앞에는 커다란 폐 건물들이 있었다. 공장과 기숙사의 흔적으로 보였다. 굳게 닫힌 철문 앞에는 폐쇄된 곳의 안전을 염려하는 소방 시설 점검 안내문이 붙어있었다. 흙을 쌓아둔 둔덕도 보였다. 


이 일대에 고려 시대부터 이어져 온 이야기가 있다면 믿을 텐가. 구글링으로 알게 되었다. 인천 서곶은 예로부터 도자기를 굽는 이들이 모여 살던 지역이었다. 장인들이 대를 이어 녹청자와 옹기를 만들었고, 박해를 피해 흘러든 천주교 신자들이 뜻을 이어받았고, 그를 계승한 최기영이라는 분이 바로 이곳에 신일토기 공장을 세웠다. 서곶의 옹기 산업은 신일토기와 운명을 함께했다. 한때는 크게 번성했지만 옹기 산업이 쇠퇴하면서 공장은 문을 닫고 토지는 공공주택지구 사업에 수용되었으며, 최기영은 2020년 작고했다고 한다. 메타세콰이어는 신일토기 사람들이 심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바로 곁에 이런 곳이 있었다니. 내가 사는 지역에 너무 무관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경험한 적도 없는, 알지도 못하는 과거를 마음대로 떠올렸다. 나는 어느새 대대로 흙을 빚어 가마에 굽던 녹청자 장인이었다. 일을 마치고 이 집으로 돌아오던 옹기장이었다. 박해를 받아 떠돌다가 정착한 천주교인이었다. 신일토기에서 일하며 메타세콰이어를 심은 노동자였다. 


물론 이 이야기는 모두 사라질 것이다. 이 땅에 만들어지는 대부분의 이야기가 그렇듯. 현재 내가 사는 집과 동네의 이야기는 어떨까? 살아보기 위해 내가 다시 쌓은 사랑은 어떨까? 먼 훗날 남아있는 이곳의 이야기가 있을까? 모든 것이 무의미해질까 두렵다. 


그릇을 만든다는 것은 의미를 만드는 일처럼 느껴진다. 흙을 모아 그릇을 빚고 불에 단단히 구워낸다. 부질없고 무용할지도 모르는 일에 쓸모와 가치를 만들어내는 일이다. 내가 전하는 이야기가 작은 종지 하나만큼이라도 의미를 가질 수 있기를 빈다. 



* 사기 인지 후 1년. 지급 명령, 임차권 등기, 전세 사기 피해자 결정. 잠시 머무는 곳에서 오래 살아야 하는 장소가 된 이후, 비로소 집과 동네에 대한 관찰과 사랑을 시작하는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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