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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키 Oct 22. 2023

이름들

끝내 사랑할 수 없는 

어떤 이들은 그저 이름들 혹은 사실들로만 남았다. 끝내 사랑할 수도 용서할 수도 없는 사람들이다. 나는 그들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아래는 모두 가명이다. 법적인 절차를 밟는 중이고 모두 관련자가 될 것이다. 


지현주는 이 집을 보여주고 계약을 진행한 중개 보조원이다. 내가 이 집을 마음에 들어하자 그 날 바로 계약을 해야 한다고 했다. 당장은 계약금이 없었다. 지현주는 자신이 돈을 빌려주겠다고 했다. 나는 바보같이 수락했다. 이사 당일에 갑자기 안심전세대출이 부결되었을 때는 어떻게든 다른 대출을 알아볼 것을 종용했다. 겨우 잔금을 치르자 자신에게도 책임이 있다며 복비를 받지 않겠다고 했다. 오히려 성의 표시라며 100만 원을 보내줬다. 일이 터진 후 다시 연락하자 자신은 아무것도 몰랐고 관련이 없다며 발뺌했다. 


박재호는 대출을 담당한 은행 직원이다. 이사 며칠 전 HUG 안심전세대출 서류를 모두 작성했고 문제 없는 것처럼 말했다. 이사 당일 아침에 갑자기 연락이 왔다. HUG가 아닌, 무슨 보험사의 거부로 이례적으로 당일 대출이 부결되었다고 했다. 이 부분은 변호사를 포함하여 아직도 모두가 명쾌하게 해석하지 못하고 있다. 지현주의 종용으로 박재호에게 계속 따져 묻자 바로 은행으로 오라고 했다. 안심전세대출이 아닌 은행 일반 전세대출을 급히 진행시켜주겠다고 했다. 반환 보증이 되지 않는 대출이었다. 박재호는 연락이 되지 않는다.


정세준은 계약서 작성만 담당한 제3 부동산의 중개사다. 지현주가 나를 인근에 있던 부동산으로 데려갔다. 나중에 알고보니 지현주가 속한 부동산이 아니었다. 계약서에 "안심전세대출이 집행되지 않을 경우 이 계약은 무효"라는 말을 넣었다. 이 부분은 나중에도 쟁점이 될 수 있다. 사기 인지 후에 연락하자 지금은 다른 부동산에서 일한다고 했다. 보증보험도 안 들었냐며 나에게 오히려 성을 냈다. 


박준용은 계약 당시 집주인이다. 집 보러갔을 때 문을 열어주었던 여성의 남편이다. 만난 적은 없다. 계약서 작성 당시에도 아내만 왔다. 얼마 후 집주인이 바뀌었으나 통행료 미납 고지서를 포함해 박준용의 서류들이 종종 우리 집으로 날라왔다. 계약서에 적힌 핸드폰 번호로 연락하면 꼬박꼬박 답장을 줬다. 사건이 터진 후 전화를 했다. 상황을 설명하자 놀라는 것처럼 보였다. 나를 위해 집 팔 때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해달라고 했다. 빌라에 붙은 "집 팔아드립니다" 전단지로 연락을 했었다고 했다. 소위 부동산 컨설팅 회사였다. 아마 이들이 배후일 것이다. 새 집주인의 연락처를 묻자 다행히 알려줬다. 아내와 아이들에게는 안된 일이지만 변호사는 박준용도 걸고 넘어질 것이라 했다. 그는 나와 생일이 같다.  


김재홍은 박준용 쪽 담당자, 즉 부동산 컨설팅 회사 소속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계약서 작성 때도 동행했다. 이사 후 몇 주 지났을 무렵, 집 앞 카페에 와서 연락을 했다. 차분하고 예의 발랐다. 집주인이 바뀌게 되었으니 세입자로서 동의 서명을 해달라고 했다. 그런 절차가 있는 줄도 몰랐다. 별수 없이 사인을 했다. 새로운 집주인에 대해 묻자 아마 투자 목적으로 매매하는 사람일 것이라 했다. 법인이 아니니 안심하라 했다. 걱정되면 종종 등기부등본을 떼보라는 조언까지 했다. 물론 그 조언은 도움이 됐다. 한참 뒤에 김재홍의 번호를 찾아내 전화를 했다. 현재는 부동산 일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내가 쏟아내는 말을 한참 듣기만 했다. 


이영두는 새로운 집주인이다. 작년 가을부터 전세사기 관련 뉴스들이 터지기 시작하자, 괜히 뭔가 불안하여 등기부등본을 떼어봤다. 내가 선순위이긴 했지만 그 뒤로 근저당이 새로 하나 설정되어 있었다. 채권최고액 50억. 근저당권자는 주식회사였는데 검색해보니 P2P 회사였다. 공동담보목록이라는 게 보였고 그 세부를 확인할 수 있었다. 백여 개의 집 주소가 그 안에 있었다. 이영두는 소위 빌라왕이었다. 뉴스에 나왔던 사망한 빌라왕은 아니지만 이런 식의 바지 집주인, 빌라왕은 전국에 한두 명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박준용이 알려준 이영두의 번호로 전화를 했다. 범죄 영화에 나오는 전형적인 사기꾼 아저씨의 능글맞은 목소리였다. 검암동 세입자라고 하자 대뜸 "보증보험 들었쥬?"라는 질문을 했다. 별다른 설명도 하지 않았는데 그 말부터 하는 걸 보면 이런 일이 잦은 것 같았다. 안 들었다고 하자 "에이, 그러면 어떡해유." 라며 능청을 떨었다. 화를 내며 따지면 자신도 맞받아쳤다. "나는 돈 없어유. 나중에 경매로 집주인 바뀌면 그때 받으면 된다니까. 아, 답답하네!"

그 뒤로 몇 번 더 이영두와 통화를 했다. 전화를 걸기 전마다 심호흡을 해야 했다. 통화 후에는 기분이 늘 더러워졌다. 사실 그에게서 실질적으로 얻어낼 수 있는 건 없다. 그는 바지일 뿐이다. 명의를 빌려주고 용돈을 받으면서 사는, 벼랑 끝에 내몰린 세입자들의 연락을 꼬박꼬박 받으면서도 화와 저주마저 조롱으로 가볍게 튕겨내는, 갈 데까지 간 막장 인생이다. 감옥에 다시 보내는 것만이 방법이다.    


계약 만료 몇 달 전 빠르게 상황을 인지한 것은 다행이다. 절망과 자책에 시달렸지만 주변의 도움으로 법적, 제도적 대응을 시작했다. 법원에서 지급명령과 임차권등기명령을 받아냈다. 앞서도 말했듯 사회적 재난의 대가로 전세사기특별법이 통과되었다. 피해자 인정 신청 후 두 달여 만에 피해자 인정을 받았다. 먼저 전세자금대출을 저리로 대환받았다. 아직 경매는 시작되지 않았다. 아마 몇 년이 걸릴 거라고 한다. 위의 이름들에 대한 민형사 소송도 곧 시작할 것이다. 모두 장기전이다. 지치지 않아야 한다.


그럼에도 난 여전히 사람을, 존재를, 집을, 동네를 사랑하려 한다. 그게 내가 무너지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 사기 인지 후 1년. 지급 명령, 임차권 등기, 전세 사기 피해자 결정. 잠시 머무는 곳에서 오래 살아야 하는 장소가 된 이후, 비로소 집과 동네에 대한 관찰과 사랑을 시작하는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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