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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키 Oct 19. 2023

공공주택지구

경작 금지의 공터

빌라 뒤로 조금 걸어가면 드넓은 공터가 나온다. 이사할 집을 보러 다닐 때부터 눈에 띄었다. 그만큼 광활했다. 도시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규모의 빈 땅이다.


처음으로 산책을 나와 공터를 가까이 보러 갔을 때 비현실적인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땅의 용도가 궁금했다. 농경지인가 싶었다. 검암이 이만큼 시골이었나? 농사의 현장이 곳곳에 보였다.


인천검암역세권 공공주택지구. 공터의 이름이었다. 표지판에는 각종 행위 제한 목록이 나와 있었다.


건축물의 건축, 인공 시설물의 설치, 토지의 형질변경, 토석의 채취, 토지의 분할 합병, 물건을 쌓아놓는 행위, 죽목을 베거나 심는 행위


최근에는 좀 더 눈에 잘 띄는 경고판이 추가되었다.


무단 경작 금지


금지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아직도 경작하는 이들이 많다. 주말 농장 안내도 어디선가 본 것 같다. 금지를 무릅쓴 채 무언가를 심고 키우고 수확하는 사람들은 어떤 마음일까? 그런 무모함을 가져본 적 없는 나는 헤아리기 어렵다.


검암 플라시아 개발사업은 "정부의 무주택 서민의 실수요자를 위한 신규 공공택지 확보정책(수도권 주택 30만호 공급계획)에 따라 추진하는 정책사업으로 서민의 주거안정 및 주거수준 향상을 도모하여 시민의 쾌적한 주거생활에 기여"한다고 한다.


약 24만 평의 땅에 공공주택 7블록과 주상복합 1블록, 복합환승센터,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그리고 각종 상업시설을 만드는 사업이다. 총 사업비만 1조가 넘는다고 한다. 원래 계획상으로는 내년 하반기에 준공을 할 예정이었다지만 직접 현장을 보면 요원해 보인다.


아직 삽도 안 뜬 상태지만, 저런 취지의 사업이 펼쳐질 땅 바로 앞에 우리 집이 있다는 사실이 얄궂다. 무주택 서민이자 주거 안정과 주거 수준 향상이 필요한 사람은 바로 나인데.


출퇴근 길에 자전거를 탈 때면 공터의 둘레를 따라 검암역까지 간다. 드넓은 땅의 사계절을, 거대한 개발의 모든 과정을 속속들이 지켜보게 될 것이다.


바로 뒤에 있는 지역이 대규모로 개발된다면 우리 집값도 혹시 오르지 않을까? 내가 이 집을 경매로 넘겨받은 후 최소한 손해는 보지 않은 채 되팔 수 있지 않을까? 살면서 한 번도 해본 적 없던 차원의 질문을 기도하듯 품는다.


물론 내가 사는 집의 현재 매매가는 전세가보다도 낮다.  


나도 조만간 무단 경작에 도전해 볼까.



* 사기 인지 후 1년. 지급 명령, 임차권 등기, 전세 사기 피해자 결정. 잠시 머무는 곳에서 오래 살아야 하는 장소가 된 이후, 비로소 집과 동네에 대한 관찰과 사랑을 시작하는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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