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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키 Oct 21. 2023

관계들

멀고도 가까운

이 집에 오면서 나와 관계 맺은 존재들을 더 사랑하게 된 것 같다. 물론 원체 정이 많았다. 그래서 상처받거나 서운해지는 일도 많았다. 이제는 좀 다르다. 정을 주면서도 상대에게 돌려줄 것을 바라지 않는다. 깊고 무거운 관계에 집착하지 않고 건강한 거리감이 있는 관계들을 넓게 두려 한다. 고립되지 않기 위한 방책인지도 모르겠다.


적지 않은 친구들이 이 집에 찾아주었다. 대부분 먼 곳에서 여기까지 와준 고마운 사람들이다. 오늘은 그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초배는 이 집에 가장 먼저 왔다. 함께 살던 강아지다. 이별 후 한동안은 초배를 만났다. 돌봄이 필요할 때 내가 초배 집에 가거나 여기에 초배를 데려왔다. 지금은 만나지 않는다. 오랜만에 이름을 말해보고 싶었다.


상희님과 력균님은 유일한 동친, 동네 친구다. 물론 차로 20분 정도의 애매한 거리가 있지만. 상희님은 서점에서 일할 때 나를 면접 보았다. 함께 일한지 얼마 안되어 퇴사했지만 친구로 남았다. 력균님은 상희님의 오랜 동거인이다. 둘 다 각자의 스타일대로 웃긴 사람들이다. 가끔씩 만나 잠깐의 시간을 나누지만 든든한 연결감을 준다. 종종 서로가 여행을 떠날 때 각 집에 있는 고양이를 돌봐주기도 한다. 동네 친구의 커다란 역할이다. 아, 두모는 두부처럼 하얀 사랑스러운 고양이다.


요즘 가장 밀착된 사이는 함께 산을 다니는 친구들이다. 미리, 산하, 우공, 지원. 플로깅하면서 등산을 하는 줍줍산책이라는 모임을 만들었다. 이들에게 요즘의 나를 가장 많이 드러내고 가장 크게 의지한다. 만나면 종일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무엇보다 모두 술을 좋아한다. 초여름에 함께 떠난 강원도 여행은 인생 최고의 여행이었다.


오랜 역사가 있는 친구들은 자주 보지 않아도 애틋하고 신뢰감이 있다. 십대에 사귄 친구 창락, 대현, 준홍이 특히 그렇다. 창락이와는 시시콜콜한 일상까지 공유한다. 대현과 준홍은 각자의 힘겨운 시기를 보내고 있지만 애써 파고들지 않고 멀리서 응원을 보낸다.


양육을 하는 이들과는 교류하는 것이 조심스럽지만 오랜만에 만나면 반가움이 더하다. 대학교 영화 동아리 선후배인 호빈, 용의, 재원 모두 아버지가 되었다. 한때는 열정만 태우던 사람들이 안정된 삶을 만들어가는 모습이 그저 대견할 뿐이다.


시절 인연이라는 말은 싫다. 시기와 상황에 따라 가까워지기도 멀어지기도 하는 것이 관계다. 괜히 시절 인연이라 말하며 섭섭함과 그리움을 호소하는 것은 아닐지. 보고 싶고 다시 연결되고 싶으면 나서서 그렇게 하면 된다. 쉬운 일은 아니지만. 전 직장을 통해 만난 이들에게 그런 마음을 표현하고 싶다. 함께 글쓰기 모임을 하던 친구들, 같은 팀 동료들, 출판계의 몇몇 사람들이 있었다. 다시 만나 즐거운 대화를 나눌 수 있기를.


사람마다 고통을 견뎌내는 자기만의 방식이 있겠지만 내게는 관계였다. 타인, 타자와 주고받는 마음과 온기로 어려운 시간들을 돌파했고 지금도 그러고 있다. 지극한 감사함을 느낀다. 그래서 이렇게 남겨둔다.




* 사기 인지 후 1년. 지급 명령, 임차권 등기, 전세 사기 피해자 결정. 잠시 머무는 곳에서 오래 살아야 하는 장소가 된 이후, 비로소 집과 동네에 대한 관찰과 사랑을 시작하는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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