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키 Oct 11. 2023

누룽지

나와 집을 지키는 존재

몇 년간 가장 잘한 선택을 고르라면, 누룽지를 입양하기로 한 결정이다. 작년 가을 누룽지는 내 곁으로 와 주었다. 친구 이지의 본가 농장에 홀로 머물던 아이였다. 고마운 친구 셋이 누룽지 원정대로 여주까지 동행해 주었다. 


처음으로 고양이와의 동거를 고민할 때, 마침 그곳에 누룽지가 머물고 있던 것부터 기적이라 믿는다. 사진으로만 보던 아이를 처음 마주한 순간 나는 얼어붙었다. 놀라움과 감격, 그리고 긴장도 있었다. 이제부터 저 생명은 온전히 내가 책임져야 한다는 무거운 책임감에서 오는 긴장. 물론 책임의 주체는 곧 뒤바뀌었다.


누룽지의 이름은 처음부터 누룽지였다. 이지가 지었던 이름인데 그보다 더 어울리는 것은 없었다. 


세상에 나온지 세 달만에 이 집에 온 룽지는 많은 처음을 나와 함께했다. 귀도 파고, 발톱도 정리하고, 중성화 수술도 받고, (가장 싫어하는 것들의 모음) 밤마다 우다다를 하고, 캣타워에도 차츰 오르고, 스크래처를 긁고, 캣휠을 달리고, 모든 색깔의 공을 굴리고, 일주일에 하나씩 낚싯대를 갈아치우고, 친구들이 왕창 선물해 준 간식을 즐기고, 내 몸의 모든 곳에 자신의 몸을 부비고, 모든 곳에 올라가고, 모든 곳에 눕고, 모든 것을 떨어뜨리고, 모든 것의 냄새를 맡았다. 


눈물에서는 어떤 맛이 났을까? 누룽지를 부둥켜안고 많은 울음을 터뜨렸다. 겨울의 차가운 공기도 끓는 속을 식히기는 어려웠다. 그럴 때면 누룽지는 내 눈물을 열심히 핥아먹었다. 위로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건 지극히 인간 중심적인 생각이다. 그저 신기했을 테다. 나의 들썩임과 흐느끼는 소리와 눈에서 흐르는 물이.

  

지난 겨울 나의 생명을 함부로 하지 않은 건 순전히 누룽지 덕이다. 살아야 했다. 살아서 지켜야 했다. 누룽지와 누룽지의 집을. 그렇게 누룽지가 나를 지켰다.  


내 근황을 불행의 연속이라 말하는 친구도 있다. 물론, 그럼에도 잘 살아있다며 치켜세우려는 의도다. 하지만 사실 인생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좋아 보이는 일도, 나빠 보이는 일도 순서나 논리 없이 제멋대로 일어난다. 이 집에서 겪은 일들과 누룽지가 지금 곁에 있음이 공존한다는 사실만 해도 그렇다. 그러니 삶에 굳이 한 방향의 내러티브를 부여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이 깨달음은 지금 내게 소중하다. 



* 사기 인지 후 1년. 지급 명령, 임차권 등기, 전세 사기 피해자 결정. 잠시 머무는 곳에서 오래 살아야 하는 장소가 된 이후, 비로소 집과 동네에 대한 관찰과 사랑을 시작하는 이야기입니다.

이전 01화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