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로로 잡힌 그는 모든 것을 포기하려고 했다.
분명 죽음은 이미 기정사실로 되어있었다. 언제, 어떻게 죽느냐의 문제일 뿐.
칠흑의 비단 같던 머리털은 모두 깎여나갔고, 그의 몸을 두르고 있던 화려한 옷가지 역시 모두 벗겨졌다.
오직 두 눈을 가리는 천 쪼가리 하나와 그의 자유를 구속하는 포승줄만이 그의 옷에 불과했다.
그는 알몸인 채로 수많은 모욕을 들으며 오랜 시간을 버텼다.
굴욕적이었다.
죽음은 모든 것을 가지고 간다.
그래서 즐거움, 충만함, 행복함, 사랑 등 긍정적인 상황 속에 있을 때 죽음은 공포가 된다.
그러나 괴로움, 허기짐, 고통 등 부정적 상황 속에서의 죽음은 안식이 된다.
그는 안식을 원했다. 죽음으로 안식을 바랄 만큼 충분히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적들은 그를 쉽게 죽이지 않았다.
그들도 죽음이 그에게 안식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적들은 어떻게 해야 그를 더 괴롭게 살려둘 수 있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한 나라의 왕이었던 그에게 모욕을 주고, 육체적 고통을 주고, 창피함을 주었다.
그러면서 절대 죽지 못하게 했다.
죽기 직전에 죽지 않을 만큼 재우고, 죽기 직전에 죽지 않을 만큼 먹였다.
그는 적들에게 죽여달라고 소리를 지르며 화를 내기도 하였고, 애원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적들은 그에게 아무런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그를 찾아온 한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예전에 그가 자신에게 아주 작은 선행을 베풀었다고 한다.
준 사람은 기억 못 한다. 그러나 받은 사람은 기억하는 법이다.
그에게 다가와 말을 걸어주었다. 그것만으로도 그의 마음속에는 무언가 불온한 감정 하나가 싹트기 시작했다.
희망.
인간은 희망이라는 것이 생기면 힘을 얻는다.
하지만 희망의 끝에 결국 절망만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더욱 무기력해진다.
그에게 다가온 이 사람은 과연 희망일까 아니면 절망일까.
“긴말하지 않겠소. 작은 칼 하나를 두고 가겠소. 이걸로 줄을 끊던지, 목숨을 끊던지. 선택은 당신의 몫이요.”
이렇게 말하고 그 사람은 그의 발치에 작은 단검 하나를 떨어트려 놓았다.
이 작은 칼 하나로 스스로 목숨을 끊을 것인가, 아니면 활로를 개척해 나갈 것인가.
그는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결국, 그는 자신의 발치에 떨어진 단검을 주웠다.
그리고 소리 없이 크게 울부짖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