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 회고록 25
이 글은 저의 할아버지가 1931년 일본에서 태어나시어 한국으로 귀국 후 약 70년간 겪어오신 삶이 담긴 회고록을 바탕으로 작성된 글로 실제 이야기입니다.
판문점에서는 휴전회담이 연일 계속되고 있었다. 포로교환문제로 회담이 가끔 중단되곤 했지만 그래도 회담은 지속되고 있었다. 방어전이라 대규모적인 전투는 없었지만 고지전투는 의연히 치열했다. 쌍방 간 선전공세는 강화되고 있었다. 지루한 방어전이 지속되니 정신적으로 해이해지고 중공군 병사의 월남귀순자가 가끔 있었고 아군 쪽에서도 월북하는 병사들도 발생했다. 불행하게도 우리 중대에서 병사 2명이 전초근무하다가 월북했다. 하필이면 노획한 따발총을 가지고 근무하던 병사가 북으로 넘어가버렸다. 정말 어처구니가 없었다. 대남방송에서 소속과 이름까지 밝히고 있었다. 인간은 신이 아니기 때문에 만능일 수는 없다. 방심하는 사이에 예상치도 못하는 큰 피해를 당하는 수가 있다. 인접중대에서 당한 일인데 야간 전초근무를 마치고 진지로 철수, 분대호(능선 중간쯤 은폐된 내무반용으로 구축된 호)에 들어가 철모, 총, 탄대를 풀고 옷을 벗고 세수하려고 하는데 적병의 기습을 당한 것이다. 대항 한번 못하고 1개분대가 전원 끌려갔다. 날이 밝았고 아군 진지라 무방비상태로 방심하는 사이에 허점을 찔린 것이다. 적이 아군병사가 철수하는 뒤를 밟아 따라온 것을 눈치 못 챘고, 피곤과 방심으로 인한 큰 실수였다. 초소 경계병에 의해 발견은 했지만 적병과 끌려가는 아군병사가 붙어서 같이 가고 있으니 총격을 가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쫓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것이 전쟁터의 교훈이다. 즉각 대남방송을 하는데 자신 월북한 병사라고 떠들어댄다.
제공권은 완전히 미군에게 있었다. 북쪽 항공기는 단 한대도 뜨지 못한다(못했다). 이를 과시나 하는 듯 미군폭격기가 매일이다시피 적진을 맹폭격을 감행한다. 대공사격도 제대로 못한다. 위치가 발견되면 쑥밭이 되기 때문에 휴전될 때까지 적기를 보지 못했다. 우리 중대가 전초중대와 임무교대 하게 됐다. 능선이 북으로 길게 뻗어있어 적으로부터 정말노출된 지형이다. 중대본부는 중간능선에 위치하고 소대는 적진과의 인접한 곳에 위치해 있다. 화기소대는 박격포(60mm)를 설치할 곳이 없어 주 저항선에서 이동하지 못했다. 식사운반도 날이 새기 전과 저녁 어두워진 연후에 이루어진다. 하루에 두 끼, 노무자들이 운반해 주고 쏜살같이 달아나듯이 돌아간다. 낙엽이 지고 나니 금방 겨울이 온다. 눈이 쌓이고 적으로부터 노출이 더 심해진다. 주간에는 꼼짝없이 호 속에 들어가 있어야 한다. 전화선이 고장 나도 주간에는 수리하지 못하고 무선으로 교신한다. 어두워진 후에 수리한다. 그곳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은 빨리 진지교대가 되기를 고대하고, 그날그날의 기다림은 하루에 두 번 날라다 주는 식사다. 노무자들이 식사를 운반해 주면 그렇게도 고마웠다. 방한복에 방한화를 신고 방한모를 깊숙이 눌러쓰고 겁에 질린 얼굴 40,50대쯤 된다. 부모와 같은 연령층이다. 안타깝고 안쓰러워 보인다. 지금은 전시, 이곳은 전쟁터다. 동정 따위는 생각할 수 없는 현실, 나는 살아야 한다.
52년의 해도 가고 53년을 맞았다. 음력설날이었던가 고향생각도 나고 해서 비상식량 쌀을 꺼내 눈 녹인 물에 담갔다가 철모에 담아 야전곡괭이 자루로 빻았다. 반죽을 해서 주먹 지어 송편처럼 만들어 반합에 물을 조금 부어 속뚜껑을 밑에다 깔고 떡 찌듯이 쪘다. 고물도 넣지 않고 간도 안 했으니 맹탕이지만 그래도 맛이 있다. 겨울도 가고 봄이 왔다. 때가 되니 진지교대가 됐다. 들어가는 중대가 또 고생하겠다. 다시 주 저항선 고지로 이동했다. 그간 사고 없이 교대하게 된 것을 감사했다. 지금 같으면 신앙이 있어 하나님께 감사했겠지만 믿음이 없었던 때라 맹목적 감사다. 그즈음 소련의 공산독재자인 스탈린의 사망이 보도됐고 판문점에서는 포로교환제의가 합의됐다. 그리고 4월에는 판문점에서 병상포로교환이 이루어졌다. 휴전이 곧 이루어질 듯싶었다. 전선의 봄은 짧기만 했다. 이제 서서히 녹음이 짙기 시작한다. 부대 사단 진지 임무교대가 된단다. 아- 이젠 살았다 싶었다. 5사단이 들어오고 우리 사단은 예비사단으로 전선에서 빠져나간다. 1년 동안에 많은 것을 체험했다. 우리는 철수준비를 서둘렀다. 선발대가 들어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낯익은 사람이 보였다. 고향(평리) 친구 김○○, 나와 동갑이었을 것이다. 반가워서 손을 잡고 악수는 했지만 시간의 여유가 없다. 우리는 철수해야 한다. 말 몇 마디 못하고 헤어졌다. 그것이 그와의 영원한 이별이 될 줄이야 어찌 짐작이나 했을까. 휴전 후에 휴가 가서 알았지만 그는 이곳에서 전사했다. 우리 부대가 철수한 후에 중공군이 5사단을 얕잡았던 모양이다. 우리 부대가 철수 며칠 후에 대공세를 취했다. 미처 지형도 파악하지 못한 채 당한 것이다. 뒤에는 북한강이 흘러 공격을 당하면 많은 희생자를 낼 수밖에 없는 지형이다. 북한강 건너까지 후퇴, 주 저항선 949 고지와 백암산을 연한 고지를 그들에게 빼앗긴 것이다. 그곳 전투에서 많은 전사자를 냈단다(후에 알게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