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 회고록 23
이 글은 저의 할아버지가 1931년 일본에서 태어나시어 한국으로 귀국 후 약 70년간 겪어오신 삶이 담긴 회고록을 바탕으로 작성된 글로 실제 이야기입니다.
주간에는 가끔 미군기의 적진폭격이 감행됐고 야간에는 피아간 포격이 있었다. 위협사격이다. 때때로 기습전투도 있었다. 그런데 나는 뜻밖에도 11중대로 전출됐다. 중대장의 요청으로 가게 된 것이다. 그 당시에는 대대장에게 인사권이 있었다. 중대는 대대 OP(지휘소) 보다 더 전방으로 나가있었다. 중대장은 제주도출신 중위였는데 이름은 잊었다. 통신반에 반장 최병돌 일등중사가 있었고 이상병(충남), 오일병(경남) 그리고 나까지 해서 네 명이다. 거기는 유무선병 가릴 것 없다. 다 해야 한다. 장비는 대대와 통하는 무전기 FM.SCR-609(AN/PRC-10)과 유선 EE-8(TA-312) 전화기 그리고 소대와의 교신용 FM-536(AN/PRC-6)와 TS-10(TA-1) 경전화기가 전부다. 그리고 소대와 분대 간의 교신도 경전화기인 TS-10(TA-1)을 사용하는데 전화선 가설과 수리는 중대에서 책임진다. 그래도 나보다 하급자가 둘이나 있어서 식사당번은 면할 수가 있었고 중대 본부소속이라 불침번도 없다. 그것 하나는 좋았지만 항상 긴장해야 하고 처음이라 무섭고 겁이 났다. 이따금 기습공격으로 교전이 있다. 서로가 위협하기 위한 행위이다. 밤이면 피아간에 대적방송으로 위압한다. 그러다가 음성이 나는 곳을 향해 방해방송을 한다. 그러다가 기관포의 사격을 한다. 날이 새면 언제 그랬더냐 싶게 평온하다. 그들의 행동하는 것도 육안으로 볼 수 있다. 우리도 태평하게 보란 듯이 행동한다. 고지가 높아서 식사는 후방에서 운반해 온다. 식수도 후방에서 가져와야 하기 때문에 물통으로 길어마시고 세수물은 겨울이나 눈을 녹여서 쓴다. 식사운반은 노무자들이 한다. 비단 식사뿐만 아니라 탄약운반 등 많은 일을 한다. 6.25 전쟁에서 노무자들의 활약도 컸지만 또한 희생자도 많았다. 그렇다고 그들 희생자들은 군인들과 같은 전사연금이나 국립묘지에 안장하는 대우도 받지 못했다.
그해(52년) 6월 클라크장군이 릿지웨이장군 후임으로 극동군 사령관으로 취임했다. 판문점에서는 포로송환문제로 휴전회담이 정돈, 전선은 교착상태, 중부전선에 적의 집중공격과 아군의 반격으로 전투가 치열했다. 12월에 미국대통령 당선자 아이젠하워 장군이 한국전선을 시찰하고 갔다. 전선이 정돈상태가 지속되고 있어 모든 화력사격은 대대지휘소(OP)의 승인 없이는 임의로 사격할 수가 없다. 그것을 적이 알고 있는지 적은 새벽에 포대에 직사포나 기관포를 설치, 아군 진지에 사격을 가하고 금방 철수해 버린다. 아군 관측소에서 발견하고도 대항사격도 못하고 대대지휘소에 보고, 사격지시를 받기 전에 적은 숨어버린다. 즉시 대항사격을 하면 부숴버릴 수 있지만 그러지 못하니 땅을 치고 통곡할 노릇이다. 작전지휘권은 미군에 있기 때문에 한국군은 그들의 지휘권 하에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이대통령이 6.25 전쟁 발발과 동시에 미군에 지휘권을 이양해 버렸다. 약한 자여 그대 이름은 한국군인가. 40여 년간을 그들이 지휘권을 행사하다가 90년대에 와서 한국군에 이양되고 휴전회담 대표도 한국군 장성으로 교체됐다. 우리 중대 방어 진지 구역 내에 전초 진 지가 있다. 주간에는 병력이 배치하지 않고 야간에만 경계배치한다. 소총소대 선임하사관(상사) 인솔하에 병사 몇 명과 통신병이 야간경계근무한다. 처음으로 내가 따라갔다. 계곡을 내려가 최전단에 방어호가 구축되어 있다. 거기서 경계근무를 하는 것이다. 밤에는 춥다. 영하 30도 이하로 내려갈 때가 있으니 엄청나게 춥다. 매일밤 호안에서 불을 피운다. 입구가 적진을 향해있지 않으니까 잘 노출되지는 않지만 바로 앞 몇 m만 나가면 적과의 방어경계선이다. 선임들은 겁이 없다. 나는 겁이 나는데도 그곳에서 밤을 새우고 먼동이 틀 무렵 전방으로 더 나가 적진을 향해 일체위협사격을 하고 급히 철수했다. 그런데 웬일인가 나뭇가지에 무엇인가 주렁주렁 매달려있는 것이 보였다. 자세히 보니 흰 자루가 매달려 있다.
조심스레 끌러서 펴보았다. 중공제 담배와 술병이 나왔다. 그러한 것이 몇 개 있었다. 선임들은 흔히 그러한 것을 많이 보아왔기 때문에 겁도 없다. 술한병을 나누어 마시고 담배도 또한 한 대씩 피웠다. 그리고 두 개는 중대본부에 갖다주었다. 만약 독약을 타왔다면 어떻게 될까. 심리전술이기 때문에 절대 독약은 놓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후에도 여러 번 그러한 것을 목격했다. 우리 앞에는 중공군이 배치하고 있었다. 또 이러한 일도 있었다. 타 중대에서 방어하던 전초 진 지를 우리 중대와 임무교대하게 됐다. 그날밤은 달빛이 유난하게도 밝았다. 추석전날이라 그랬던가보다. 오후부터 적의 포탄이 간헐적으로 전초선에 여기저기 떨어졌다. 저녁때쯤 되니 그 수가 더해갔다. 그러한 가운데 병사들은 전초 진지 개인호에 투입됐다. 시간이 갈수록 적의 포사격이 더 심해갔다. 적의 기습공격이 있을 때에는 미리 탄착조준을 주간에 미리 해둔다. 아군 쪽에서도 철저한 경계를 하고 있다. 적의 전술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중대본부에서 수시로 전화가 온다. 이상유무를 확인하기 위해서다. 이제 적의 포격이 맹렬해진다. 전 전선이 긴장되고 이곳을 주시하고 있다. 탄착지점이 하단에서부터 점점 위로 올라온다. 필시 적의 기습공격이다. 탄착점이 위로 점점 더 올라오고 있다. 그 뒤에는 적병이 따라 올라오고 있다. 전초병 가까이 까지 적포탄이 떨어진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아군의 진내 지원포 사격을 요청했다. 순식간에 진내에 지원사격이 시작됐다. 피아의 포사격이 진동을 했다. 긴장된 순간이 계속되고 있다. 피가 마를 지경이다.
가을이라 숲이 우거져 관측하기가 용이하지 않은 지형이라 숨어서 올라오는 적병이 쉽게 발견하지 못한 것 같다. 갑자기 전초병의 총성이 울렸다. 전초병(적을 경계하기 위하여 가장 앞쪽에 배치한 초소나 초병)들은 적을 발견하기 전에는 절대 사격을 하지 않는다. 그들이 적병을 발견한 것 같다. 총격과 수류탄의 폭음. 적의 포격은 능선과 후사면으로 떨어진다. 공중에는 아군이 쏜 조명탄이 밤하늘을 밝혀 지면까지 대낮과 같이 밝다. 총격과 수류탄의 투척전이 맹렬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총성도 멈추고 조용해졌다. 달은 휘황찬란하다. 이때쯤 휴전회담이 정돈, 전선은 교착상태에 빠져있을 때라 전투는 소강상태라, 대규모적 전투는 하지 않고 소규모전이 있을 뿐이었다. 보통 교전은 5~10분간으로 끝이 난다. 그런데 이번전투는 4~5시간의 전투라, 큰 전투라 할 수 있다. 적은 철수 했다. 결과를 확인했다. 아군의 피해는 자동소총수 전사 1명이다. 적의 피해는 알 수 없었지만 짐작컨대 8~9명이 사살된 것 같다. 그들은 부상자, 시체는 절대 두고 가지 않는다. 갈대숲의 시체를 끌고 간 자리를 확인한 결과다. 그리고 중공제 기관단총(따발총)을 9정 노획했다. 전쟁터에서는 용감해야 하지만 미련한 용감은 피해 보기가 십상이다. 자동소총수의 죽음도 지나치게 용감해서였다. 그는 적을 발견했는데 지형에 엄폐되어 수류탄을 던지고 숨곤 하니 안타까웠던 것 같다. 그래서 용감하게 호 위로 수류탄을 들고 올라가 투척을 하기 위해 안전핀을 막 뽑은 순간에 적이 먼저 발견하고 그에게 수류탄을 던졌다. 명중되어 터지면서 들고 있던 수류탄이 동시에 터진 것이다. 연락병의 전달을 받고 소대장이 뛰어나갔다. 나도 그 뒤를 쫓아가보았다. 완전히 숨이 끊어지지 않고 좌우로 서서히 몸부림을 하고 있었다. 참 안타까운 순간이다. 곧 숨을 거두었다. 곧 들것에 실려 후송됐다. 날이 밝아서 여기저기 매달려있는 포대를 발견, 떼어왔는데 장기, 화투, 수건 등이 들어있었다. 추석이라 매달아 놓고 간 것이다. 전사 한 명이 있었지만 결과는 아군의 승리다. 그들은 무기를 버릴지라도 인명은 결코 버려두지 않고 데려간다. 우리와 반대인 것 같다. 그들은 용감하다. 아군의 능선 진지까지 왔다 갔다는 흔적으로 위문대를 남기고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