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 회고록 33
이 글은 저의 할아버지가 1931년 일본에서 태어나시어 한국으로 귀국 후 약 70년간 겪어오신 삶이 담긴 회고록을 바탕으로 작성된 글로 실제 이야기입니다.
54년 8월 1일부 이등상사(중사)로 진급이 됐다. 봉급이 7천여 원이 됐다. 쌀 한가마값이 됐을까 하는 적은 금액이다. 그때에는 진급이란 별 흥미도 없었다. 봉급이 조금 많았으니까 좋았을 뿐. 내무반이 온통 상사들이 수두룩하다. 반장도 상사, 반원도 상사니 그럴 수밖에 없다. 첫 봉급을 탔는데 출장 가란다. 제대병 인솔출장 겸 휴가다. 12일간이었던가. 여하튼 반갑다. 다음날 연대장에게 신고하고 사단사령부로 갔다. 지역별로 할당하는데 나는 충남제대자 인솔자로 지명됐다. 그 당시에는 지금처럼 각자가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인솔해다가 해당 병사구 사령부(병무청)에 인계하고 인수증을 받아와야 했다. 충남제대자가 6명이었던가 많지는 않았다(10일 간격으로 제대특명이 남). 개인기록서류와 특명 지를 내가 휴대했으니 개인행동을 취할 수 없다. 나를 놓칠세라 따라다녔다. 용산역까지는 부대차로 수송을 해주었다. 여기서부터는 내 꽁무니를 붙잡고 놓칠세라 따라다녔다. 용산에서 오후에 열차 편으로 출발, 대전역에 늦게 도착했다. 대전은 나에게 잠시였지만 추억이 담긴 곳이다. 통신학교를 수료하고 전방에 가면서 동료들과 하룻밤 묵고 간 곳이다. 많은 동료들이 전사했다. 몇 명이나 남았을까. 우선 잠자리를 정해야 했다. 가까운 여관을 찾아 잠자리를 정했다. 숙박비와 식대를 내 몫까지 그들이 분담하고 술까지 받아주니 고마웠다. 다음날 일찍 병사구 사령부에 들어가 인원과 기록서류와 특명을 넘겨주고 인수증을 받고 나는 곧바로 열차 편으로 광주로 갔다. 그 당시 하사관 이상 장교까지 급료가 적어 그것을 보상해 주기 위해 매월 쌀 60kg 한가마와 보리쌀 45kg 한가마씩을 가족에게 지급되고 있었다. 나는 미처 확인이 되지 않아 부대에서 확인서류를 작성해 갔다. 지역보급소에 가서 서류를 제출했다. 확인서를 해주면서 군 보급소에 제출하면 지급받을 수 있단다. 급히 서둘러 버스 편으로 집에 왔다. 집에서는 소식도 없이 내가 불쑥 나타나니 놀랄 수밖에. 부모님과 동생들이 반가워했다. 8월이라 추수는 아직 멀었고 식량에 곤란할 때다. 다음날 즉시 군 소재지에 있는 배급소에 갔다. 8월에 진급했으니까 12월까지 5개월분의 양을 배급받았다. 식량이 귀할 때라 동리 장 보러 온 우거 편에 다 보낸 것 같다. 쌀이 60kg들이 5 가마니와 보리쌀 45kg들이 5 가마니가 집에 있는 식구 가을에서 겨울식량이 큰 보탬이 됐을 것이다. 그런 사람이 동네에서 나 혼자였으니까 동리사람들이 부러워했단다.
다시 동부전선으로 돌아갔다. 거기서는 할 일이 없다. 휴전이 된 지도 1년이 되고도 한참 지났다. 휴전선은 평화롭다. 남북간 충돌이란 거의 없었다. 이것이 참평화 인가 싶었다. OP에 갔다가 CP에 내려와 있다가 나 자신도 자유로웠다. 부락에는 가게가 있었고 술을 파는 민가도 있었다. 할 일 없으니 자연 술만 마시게 된다. 밤에는 건전지로 도랑에서 물고기를 잡아다가 매운탕 끓여 안주삼아. 선임들은 거의 제대해 나갔고 간섭하는 상급자도 거의 없다. 자연 나태하고 해이해진다. 가을도 가고 겨울도 갔다. 55년의 새해를 맞았다. 봄도 지나 여름이 왔지만 별로 바뀐 것 없이 가을로 접어들었다. 갑자기 병력차출이 있다는 소식이다. 우리 대대에 통신정비 하사관 한 명이 할당이 된 것이다. 창설부대라는데 내가 가고 싶었다. 너무나 무료한 나날을 보내니 무엇인가 변화되고 싶었다. 통신대장(김봉거 소위)에게 나를 보내달라고 졸랐다. 누군가는 가야 하기 때문에 나의 간청 못 이겨 승낙했다. 다음날 출발이다. 그날밤 회식을 하고 다음날 생사를 같이했던 전우들과 작별하고 떠났다. 내 주특기가 무전병이라 정비로 바꾸고서 갈 수가 있었다. 연대본부 인사과에 갔다. 나와 같이 갈 사람은 병장 한 명과 일병 한 명 해서 3명이다. 창설부대가 아니라 15사단이라는 것이다. 실망했지만 그래도 가고 싶었다. 15사단이 화천에 주둔하고 있다는 것만 알고 떠났다. 오래되어 이름은 잊었지만 일병이 서울에 들렀다 가잔다. 이북출신인데 마포에 사촌이 부자로 살고 있단다. 그곳에 들려 하룻밤 묵고 가잔다. 춘천까지 군트럭을 타고 와서 춘천에서 서울까지 열차로 갔다. 그때는 시내전차가 있었다. 전차를 타고 마포종점에서 내렸다. 거기서 가까운 곳에 그의 사촌집이 있었다. 한옥으로 비교적 잘 사는 집이었다. 그 집을 찾아들어갔다. 그의 숙모 되신 분이 나와서 맞아주셨다. 조카였지만 별 반가운 것 같지 않은 것 같아 보였다. 친자식도 아닌 조카자식이고 축내러 왔는데 무엇 반가울 거 없겠지만 어쨌거나 우리는 들어갔다. 방하나 정해주어서 그 방으로 들어갔다. 바깥 벽 쪽에 여닫는 창문이 있는데 바깥 골목으로 드나들 수 있는 문이다. 지금 같으면 문을 그렇게 달지 않을 텐데. 저녁밥을 차려다 주어서 시장했던 참이라 맛있게 잘 먹었다. 서울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니 신고일자가 하루 지연하게 됐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것 나중에 도착해서 처벌을 받더라도 할 수 없는 것 이왕지사 잠이나 편히 자고 가기로 하고 드러누웠다. 밤은 깊어가고 시내 전차소리도 끊겼다. 그런데 딸랑딸랑 종소리와 함께 묵, 당고(단자) 사려 하는 소리가 골목길에서 들려온다. 잠은 오지 않고 고픗하던 참이라 창문을 열고 불렀다. 묵과 단자를 사서 먹고 잤다. 서울의 밤거리에 지금은 거의 사라진 것들이다. 다음날 열차 편으로 춘천으로 가는데 도중에 이동헌병이 증명조사하러 저쪽 칸에서 이쪽으로 오고 있다. 재수 없으면 적발되어 부대에 통보되면 그것도 처벌대상이 되니 피하는 것이 좋겠지. 변소 간에 숨어서 지나가기를 기다리기도 했다. 춘천에 도착했다. 물어물어 차도 타고 걷기도 하고 해서 부대를 찾아갔다. 지금은 사단보충대로 가 신고하면 되지만 그 당시에는 보충대가 없었고 직접 해당병과 참모부에 전입신고했다. 우리 세 사람은 통신참모부에 가서 전입신고를 했다. 하루 늦었지만 별로 탓하지 않고 중대본부로 가라고 했다. 중대장에게 신고하고 주특기가 정비라 정비소대로 보내졌다. 소대장은 김준위, 하사관 출신이었고, 선임하사관은 이북출신인데 김중사, 입대가 나보다 조금 빨랐다. 정비실과 내무반이 따로 있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 했던가. 보급관이 결혼하고 신부를 데려와 새살림을 차렸는데 하사관들에게 한턱내는 날이었다. 나는 전에 있던 부대에서 하도 술을 많이 마셨기에 이곳에서는 술을 애초부터 끊으려고 작심했다. 나도 하사관이라 같이 가자는 것이다. 나는 처음 사양했다. 그랬지만 이중사가 자꾸 끄니 어쩔 수 없이 못 이기는 척 따라갔다. 산비탈 펑퍼짐한 곳에 조그마하게 막사가 지어져 있다. 그곳이 그들의 원앙의 보금자리란다. 방안에 들어가 봤더니 마치 민가의 신혼부부의 방이다. 안주가 푸짐하게 차려져 있었고 술도 넉넉하게 준비해 있었다. 술잔이 각자에게 놓아지고 술도 신부가 한잔씩 따라주었다. 다 같이 술잔을 들어 건배를 하고 마신다. 나는 어찌할까 망설였다. 옆에서 자꾸 마시라고 독촉을 하는데 자신도 모르게 술잔이 입에 대해졌고 그냥 목구멍으로 털어 넣었다. 한잔이 들어가니 모르겠다 마시자 기어이 끊지 못하고 다시 시작한 것이다. 어쩔 수 없는 것인가 보다. 그 부대를 떠날 때까지 술을 끊지 못하고 말았다. 부대는 영외거주가 없다. 전 장병 영내거주다. 다만 참모와 보좌관 그리고 중대장은 별도 숙소를 짓고 거주하고 결혼하고 동거하는 장교들만 살림할 수 있도록 숙소를 지어주었다. 밤에는 내무반에서 자고 낮에는 정비실에 나와 있었다. 본디 주특기가 정비가 아니라 기술이 없다. 셋 다 그러했다. 할일없이 시간만 보내는 것이다. 매일매일 할일없이 지나니 시간은 가지 않고 지루하기만 했다. 그렇다고 무전소대로 보내달랄 수도 없다. 그곳에도 하사관이 초과 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던 차에 가설소대 선임하사관이 제대특명이 났다. 그래서 그곳이 공석이 돼서 내가 가설소대 선임하사관으로 가게 됐다. 해보지 않았지만 닥치면 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