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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할아버지 회고록 Mar 04. 2024

제대(1955년)

할아버지 회고록 34

이 글은 저의 할아버지가 1931년 일본에서 태어나시어 한국으로 귀국 후 약 70년간 겪어오신 삶이 담긴 회고록을 바탕으로 작성된 글로 실제 이야기입니다.



제대(1955년)



 가설소대에 통신교육대의 선임하사관 최상사가 있었는데 나와 친했다. 그리고 우리 소대장 김준위와도 친하게 지냈다. 김준위는 부인과 아이 둘을 데리고 살림을 부대 앞 하천가에 부대에서 지어준 움막집에서 살았다. 나와 최상 사는 자주 그 집에 가서 술을 마시곤 했다. 부인은 서울태생이었고 우리와 허물없이 대하곤 했다. 한 번은 김준위 내외를 우리가 장난 삼아 싸움을 붙인 적이 있었다. 부대인근에 다방이 있었는데 김준위가 그 다방에 자주 다니며 마담 MADAME을 누님 하면서 친하게 지낸 것을 알았다. 그것을 김준위 부인에게 고자질했다. 가뜩이나 외로운데 화가 났다. 며칠간은 서로가 말을 하지 않고 지내는 것 같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어떻게 해서 겨우 화해를 시킨 일도 있었다. 그해(55년) 겨울에 눈이 엄청나게 많은 눈이 내렸다. 우리 키의 가슴까지 닿을 정도로 내렸다. 인력으로 눈을 치울 수 없어 중장비로 치웠다. 동부전선 쪽은 그 이상으로 눈이 내렸다. 부대막사의 지붕에 닿을 정도로 내렸고 군부대건물이 눈사태로 붕괴되는 것도 많았다. 전방고지 호에서는 질식사가 많이 발생했다. 겨울 비상용으로 식량과 건빵 그리고 연료로 참숯을 구워서 비축하고 있었다. 폭설로 호가 덮여 출입문을 열지 못한 상태에서 숯불을 피워 밥을 해 먹고 추위를 막았는데 여기에서 발생한 가스 GAS에 의해 질식사한 사건들이다. 심지어 눈사고로 실종된 병사를 탈영으로 취급, 일보가 삭제되 종결지었는데 봄이 되어 눈이 녹으니 시체가 발견되기도 했다. 그 후에는 그렇게 많은 눈은 내리지 않았다.


 그러한 가운데 겨울은 가고 56년의 봄이 왔다. 나의 15사단 근무, 평범했다. 4월이었던가 육군사관학교 정규 4년제를 졸업한 육사 11기생 장교가 배출, 우리 통신중대에도 한 사람 전입해 왔다. 이영하 소위, 사진장교로 보임했다(훗날 62년도 1 군사통신부 보급과에서 만나 같이 근무). 눈 덮인 산야도 자연 앞에서는 굴복할 수밖에는 없는가 보다. 눈이 녹고 그 자리에는 푸릇푸릇 새싹들이 돋아나기 시작하고 있다. 그리고 금방 신록의 계절이 왔다. 세월이란 참 빨리 가는가 보다. 5월에 접어들어 모처럼만에 하사관단에서 야유회를 갖기로 했다. 여러 가지 음식과 안주 등을 풍족하게 준비해서 부대서 조금 멀리 떨어진 산계곡으로 갔다. 물 맑고 공기 좋은 곳 본래 강원도야 물 맑고 공기 좋은 곳이란 예나 지금이나 좋은 곳이다. 먹고 마시며 노래도 부르며 즐거운 하루를 보냈다. 그동안 쌓였던 피로도 흐르는 물과 같이 말끔히 씻어 보냈다. 해 질 무렵에 부대로 돌아왔다. 중대본부에서 제대희망자 신청하라고 통보가 왔다. 나는 신청했다. 나가봤자 별 수없지만 군대생활이 싫었다. 희망자보다 불희망자가 더 많았다. 그들은 현 사회실정을 잘 판단 심사숙고해서였던가. 그 당시 이등상사(현 중사) 급료가 7천 원이 약간 넘을 정도로 쌀로 치면 한가마값 정도밖에 되지 않고 한 달 용돈도 모자란다. 그러니 희망도 없다. 집에 가서 고생을 각오했다. 그해(55년) 6월 10일부로 제대특명이 났다. 군대생활 4년 종지부를 찍은 것이다. 지난날을 뒤돌아보면 훈련소 신병교육과 하사관학교, 중부전선에서의 전투, 휴전 이후 중동부에서 동부전선, 그리고 다시 중부전선에서 마감하게 된 것이다.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우리 통신중대에서 6명이 같이 나가게 된 것이다. 전날 하사관단에서 송별회식을 해주었다. 지난날을 회상하며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취했다. 다음날 참모와 중대장에게 신고하고 그리고 중대원들과 작별, 사단연병장에 모였다. 수백 명이 되는 것 같다. 사단장 박기병 소장의 그동안의 노고에 대한 치사가 있었고 표창장 수여, 그리고 일일이 악수를 해줬다.


 그 당시 제대비가 계급을 불문 개인당 6천 원씩인가 나왔다. 교통비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군악대의 연주를 들으면서 차량에 승차, 정들었던 부대를 떠났다. 부대장병들이 손을 흔들어 석별의 정을 나누었다. 서울에서 각자 흩어져 고향집으로 가는 것이다. 저녁때쯤 집에 당도했다. 갑자기 예고도 없이 나타나니 부모님과 동생들은 휴가 온 줄 알았을 것이다. 그 당시에는 제대복이란 없었고 군복차림으로(계급장은 떼고) 왔으니 그럴 만도 했겠지. 제대했다고 말씀드렸더니 반가워하시면서도 걱정이 되시는 눈치시다. 한정된 남의 농토에 식구는 많고 걱정이 앞서시는 모양이시다. 또 식구가 한 사람 늘었으니!! 때마침 농번기라 논매기에 바쁠 때였다. 인사하러 갈만한 곳도 없고 해서 다음날부터 농사일에 열심했다. 논도 매고 풀도 베고 하지 않던 일이라 내 딴에는 힘들었다. 군대 가기 전이나 4년 후인 지금이나 생활형편은 그대로다. 조금도 나아진 것도 없다. 식량걱정도 마찬가지다. 제대를 하지 말 것을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이제 와서 부질없는 생각이지만 막막하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날이 갈수록 나 자신이 추하게 느껴진다. 우물 안 개구리처럼 내 가살 고있는 고장 그 마을밖엔 모른다. 내 나이 26살 그 당시엔 내 나이에 장가가도 이른 나이도 아니다. 한심하다. 제대하고 얼마 지나서였던가. 군 양곡배급소에서 미수령분 양곡을 수령해 가라는 통지서가 왔다. 강진읍 장날을 택해 읍에 있는 배급소에 갔다. 12개월분인가 밀려있었다. 매월 주는 것이 아니라 부정기적으로 통지가 오면 수령하곤 했던 것 같다. 어떻게 되서인지 모르지만 많은 것이 미지불되어 있었다. 쌀 60 kg×12 보리쌀 45 kg×12 우마차에 실어도 하나 가득 되겠다. 우거를 가지고 장터에 온 동리 인편에 쌀 3 가마와 보리쌀 3 가마를 부탁해 실어 보내고 나머지는 현금으로 바꾸었다. 그 당시 화폐가치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잘 기억이 나지 않음) 많은 돈이 다. 지금처럼 버스도 많지 않았고 더군다나 택시란 대도시에도 흔치 않았는데 시골이야 있을 턱이 없다. 어떻게 하나 집에까지 가려면 까치내고개를 넘어야 한다. "모란이 피기까지"의 시인 김영란의 옛집 앞을 지나 재에 오르면 작천땅이 보이지만 밤에는 산짐승이 많았다. 살쾡이가 나타나 사람에게 해코지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성전으로 돌아가자니 멀기도 하지만(40리) 산모퉁이를 돌아서 가야 하니 위험하다. 그러나 조금 가까운 길인 까치내재를 용기 내서 걸어가기로 마음먹었다(30리 길). 신작로로 한참 가는데 누군가가 아는 척 인사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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