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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각 Oct 21. 2021

서는 데가 바뀌면
풍경도 달라진다

아빠 육아는 엄마 육아와 얼마나 다를까

아빠가 하면 다르다고 보여주고 싶었다. 아빠의 육아는 엄마의 그것과는 다른 특별함이 있다고. 


당장 '아빠 육아'로 검색하면 그럴듯한 근거 여러 개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수많은 대학 연구진과 육아 전문가들은 아빠와 시간을 많이 보낼수록 아이의 IQ가 높아지고 언어능력이 발달되며 논리력도 향상된다고 말했다. 두뇌 발달이나 학습을 위해 동화책을 읽거나 소근육 활동을 하는 엄마와는 달리 아빠는 위험을 무릅쓰고 자유분방한 신체놀이를 즐기는 덕분에 창의적이고 자기 주도적인 아이로 자란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아내의 육아는 어딘가 소극적이었다. 웬만하면 밖으로 안 나가려 했고 집에서조차 한 곳에 앉아 조용히 놀아주고 있었다. 뒤처리가 곤란한 놀잇감은 시도조차 꺼렸다. 아쉬운 마음에 바통 터치를 하고 놀이터에서 실컷 뛰어놀게 하거나 번쩍 들어 비행기를 태워주면 아이는 신나는 표정으로 크게 웃었다. 


역시 괜찮은 아빠야. 어깨가 절로 으쓱했다.


아빠의 육아는 큰 부담도 없었다. 주말 하루 한 시간만 투자하면 엄마가 못해준 부분을 금세 채워 준다고 했다. 그것도 힘들면 하루 10분, 심지어 하루 1분만 집중해서 잘 놀아줘도 효과는 비슷하다고도 했다. 앞으로 3년은 육아 휴직으로 아이와 종일 붙어 있을 예정이었다. 이 엄청난 시간을 딸에게 쓴다면 IQ와 창의력이 얼마나 성장할지 가늠조차 어려웠다. 5개 국어쯤은 너끈한 아인슈타인이 조만간 한국에 등장할지도 모른다는 기대에 절로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나이가 든다 싶더니 기력이 딸린 걸까 여성 호르몬이 늘어난 걸까. 막상 휴직하고 나서는 아빠다운 박력 있는(?) 육아를 보여주지 못했다. 


아이는 무릇 뛰어놀아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너무 덥거나 너무 춥거나 너무 일교차가 커서 놀이터에 나갈 수 없다고 말하는 날이 늘었다. 자유롭게 조물딱 거리는 모습이 귀여웠던 찰흙 놀이는 뒤처리가 곤란해 구석에 몰래 숨겨 놓은 천덕꾸러기가 됐다. 예전에는 번쩍번쩍 비행기도 잘 태워줬는데 지금은 급작스럽게 달려들어 안기는 아이가 부담스러워 인상을 찡그리고야 만다. 즐겁게 노는 건 죄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뛰지 말고 던지지 말고 소리 지르지 말라며 잔소리를 늘어놓기에 바빴다.


여전히 아이를 사랑하고 있는데 대하는 자세는 180도 달라져 있었다. 뭔가에 씌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반면에 아내는 한층 여유로운 자세로 아이와 이것저것을 함께 했다. 일찍 일어난 아이를 데리고 놀이터에 나가거나 찰흙을 꺼내 모형을 빚으며 놀았다. 물통에 물을 담더니 물감 놀이도 하고 설거지 놀이도 했다. 힘들다는 이유로 소홀했던 아이에게 정성을 다하는 아내가 고맙...기는 커녕 짜증이 치밀었다.


이런 날씨에 애 데리고 나가면 감기 걸리는 거 몰라? 

찰흙 놀이를 할 거면 그때그때 치워가며 놀던가. 가루 떨어지면 청소는 누가 하냐.

물감 놀이할 때 앞치마라도 좀 입혀. 옷에 묻으면 얼마나 번거로운데.


아내는 그때마다 못난 내 짜증을 받아주며 좀 더 조심하겠다고 했다.

다만 아이와 오래 못 있으니 미안해서 그런 것뿐이라며.




뭐, 나라고 아이와 즐겁게 놀고 싶은 마음이 없을까. 단지 집안일과 육아가 뒤범벅된 이 혼돈의 도가니 속에서 누군가는 일상의 끈을 부여잡아야 했을 뿐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약간의 통제가 필요한 것도 사실이었고.


올해 처음 어린이집에 다니며 적응 좀 하려던 아이는 코로나 19 확산으로 몇 달을 다시 집에 머물러야 했었다. 오랜만의 등원인데 괜한 외출로 감기라도 걸려 적응이 늦어질까 하는 걱정에 잠시만 놀이터 가는 걸 자제했으면 바랄 뿐이었다. 뛰거나 물건 던지는 버릇을 놔두면 어린이집 친구들에게 해라도 끼칠까 봐 훈육도 시작해야 했다.


온 집안에 미세먼지를 뿌리는 주범인 찰흙 놀이를 방관만 하면 아이 호흡기는 누가 지킬지 궁금했고 예전만큼 번쩍 안아 놀아주지 못해 마음 아프지만 아이를 돌보느라 이미 너무 많이 써버려 망가진 어깨로 무리했다가는 집안일할 사람이 남지 않았다.




소름이 돋았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익숙한 변명(?)이었다. 얼마 전까지 아내가 내게 자주 하던 하소연이었다. 입장 바뀐 지 얼마나 됐다고 마치 영혼이라도 바꾼 것처럼 아내는 예전의 나처럼 그리고 나는 아내처럼 생각하며 행동하고 있었다.


'서는 데가 바뀌면 풍경도 달라지는 법'이라고 했던가. 가장이 된 아내는 좀 더 씩씩해졌고 주부가 된 나는 예전보단 섬세해졌다. 그렇게 뒤바뀐 역학관계 속에서 적응해 나가야 했지만 둘 중 한 명은 규범적 세계를 다른 한 명은 자유로운 세상을 아이와 나눈다는 점에서 예전과 다를 게 없었다.




소위 '아빠 육아'의 특별함이란 남자라는 성별이 준 선물이 아니었다. 그저 부모 중 아이와 조금 적은 시간을 보내는 한 명이 미안한 마음에 느슨하고 자유롭게 아이를 풀어주다 보니 얻게 되는 부산물에 가까웠다.

 

아빠의 육아 참여율이 아직 열악한 현실에서 적절한 격려와 칭찬으로 이를 높이려는 시도는 필요하다. 다만 지금처럼 굳이 '엄마와 비교'해서 그 효과를 과장되게 설명해야 하는지는 의문이다. 예전의 나처럼 자칫 아빠의 역할을 과대평가하고 엄마의 육아를 무시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아이에게는 꼭 '아빠'가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단지 서로를 보완하며 함께 있어줄 '부모'가 필요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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