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각 Oct 22. 2021

얻어 키운 아이

중고 물건에는 사랑이 없나요

아내의 배가 내 것보다 커졌을 때 뱃속의 태아가 딸임을 알게 됐다. 소식을 전해 들은 많은 사람들이 축하해줬고 또 일부는 부러워했다. 특히 아들 키우는 엄마가 더 그랬다. 에너지가 넘치는 아들에 비해 딸은 덜 극성맞아 키우기가 쉽다고. 옷이나 신발을 고를 때도 여아용이 남아용보다 디자인이 예뻐 사줄 맛도 난다고 했다. 딸이었으면 벌써 애들 옷장이 꽉 찼을 거란다.


평소 아들이든 딸이든 성별을 크게 중시하지 않았던 터라 속으로 갸우뚱했다. 덜 극성맞아 편하다는 얘기야 그렇다 쳐도 더 예쁜 옷을 사줄 수 있다는 사실이 딸이 더 좋은 이유까지 될 수 있을까.

아들 둘을 키운다던 선배가 팔을 툭 치면서 말했다.


아직 잘 몰라서 그래요. 키우다 보면 차차 내 말이 맞다는 걸 알게 될 거야.




3년을 꽉 채워 딸을 키우고 있지만 선배의 예언(?)과는 달리 우리 부부는 여태까지 아이에게 큰돈을 쓴 적이 없었다. 살뜰한 처형이 옷과 장난감부터 그릇에 의자까지 조카들이나 지인들이 썼던 유아용 물품을 주기적으로 보내줬기 때문이다. 나와 아내가 친구들로부터 가끔씩 받는 용품까지 더하면 그 양이 상당했다. 


하도 딸에게 지갑을 열지 않다 보니 주변에서 둘째냐는 얘기까지 들었다. 대부분 첫 아이에게는 헌신적으로 투자하니까. 그런데 외동이라고 답하면 깜짝 놀란다. 딸 하나인데 예쁜 옷 입혀주고 싶은 생각이 안 드냐고 물으며. 받은 것들 중에도 예쁜 게 많다고 답하면 '그래도 자식'인데라고 말을 흐리다 이내 주제를 바꿨다.




합리적으로 잘 키우고 있다고 생각하다가도 이런 이야기를 듣는 날이면 마음이 켕겼다. 절약이라는 말로 포장해 딸에게 너무 야박하게 굴었나. 아내를 불러 부족한 걸 찾기 시작했지만 딱히 생각나지 않았다. 아이에게 물어도 똑같았다. 


뭐 필요한 거 없니. 

응, 없지.


어린 나이였다. 좋아하는 캐릭터가 새겨진 너무 크거나 작지 않은 옷이면 충분했다. 값비싼 장난감보다 종이 접기를 좋아하고 휴지심을 망원경이라며 노는 아이였다. 2만 원짜리 미미 인형과 5천 원짜리 다이소 인형 모두 '예쁜 언니'라고 똑같이 좋아하는 어린아이.




그걸 알면서도 딸을 끌고 마트에 갔다. 옷도 구경하고 장난감 코너도 들렀다. 이것 괜찮니 저것 괜찮지 계속 말을 걸었다. 아이는 구경하는 걸 좋아했지만 막상 사고 싶은 건 없다 했다. 그러면 아빠는 괜히 미안해지잖니. 죄책감 때문인지 체면 때문인지 구분도 못한 채 적당히 물건을 골라 계산대에 올렸다. 그리고 집에 와서 물었다. 오늘 사준 거 맘에 드냐고.


아이는 거짓말을 못한다고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갖게 된 물건에는 흥미가 없었다. 안 써도 되는 돈이었고 안 사도 되는 것이었는데 반응이 시원찮으니 속이 상했다. 널 위해 '투자'를 했는데 이러면 안 되지. 아빠 마음 편하자고 멋대로 결정했으면서 아이가 이걸 사랑이라고 받아주길 강요했다. 쪼잔한 아빠 머릿속에 본전 생각이 맴돌았다.



줏대 없이 휘둘리니 남은 건 영광 없는 상처였다. 애초에 왜 중고 용품을 얻어 키웠는지에 대해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었다.


돈 아껴서 좋았다만 '거지 근성' 때문은 아니었다. 고소득자 거나 자산가는 아녔지만 일상적인 소비도 못 할 정도로 어렵지는 않았으니까. 다만 이유 없이 돈 쓰는 건 싫었다. 부모의 판단으로 사야 하는 물건들도 있었지만 옷과 신발 등은 취향의 영역이었다. 그리고 아이는 그것을 정확히 표현하는 능력이 아직 미숙했다. 좋다는 말만 믿고 샀다가 포장만 뜯고 구석에 처박힌 물건들이 대체 몇 개였던가. 중고 마켓에 '똥값'으로 팔기엔 아까웠지만 그냥 버리는 건 자원낭비라 눈물을 흘리며 처분할 때도 많았다.


실패가 쌓이면서 아내와 나는 아이가 크게 요구하지 않는 한 최대한 얻은 물건으로 키우고 그 돈은 아꼈다 딸이 커서 꼭 필요한 것이 생길 때 지원해주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부모의 욕심 혹은 죄책감에 선제적으로 베풀고 그에 합당한 반응을 바로 요구하는 건 아이가 자유롭게 크는 데 좋을 리가 없었다. 싫어도 좋은 척하라고 거짓말을 강요하는 셈이니.


덧붙여 아내는 처형의 중고 물품이 가족애도 느끼게 해 준다고 좋아했다. 결혼 전부터 이뻐했던 조카들이 사용했던 물건을 딸이 쓸 때면 조카의 어린 시절이 떠오르며 뭉클해진다는 것이다. 이 기쁨을 뿌리치고 굳이 생경한 새 제품을 살 동기가 없었다.




결국 큰 문제없던 육아를 들쑤셔 소동을 일으킨 건 주위에 휩쓸려 중심을 잃었던 내 줏대 없는 마음이었다. 돌고 돌아 결국 제자리로 왔다는 생각에 허탈했지만 이 참에 아이를 키울 때 원칙을 세우는 게 왜 중요한지 생각해보는 계기가 됐다.


'무릇 움직이는 것은 나뭇가지도 아니고 바람도 아니며 네 마음뿐'이라던 어느 영화의 도입부 대사가 유난히 귓가에 맴도는 날이었다.   



이전 08화 서는 데가 바뀌면 풍경도 달라진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