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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각 Oct 20. 2021

가장 보통의 존재

평범하게 키우겠다는 생각의 함정

열어보니 안 떼어내도 괜찮을 것 같네요.

정말입니까? 아유, 선생님.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다섯 살 아들의 배가 심상치 않게 나왔다는 생각은 했었지만 워낙 잘 먹길래 똥배려니 했다. 어느 날 평소처럼 밥을 먹던 아이가 분수처럼 토하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부모님은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걸 알았다. 한달음에 달려간 병원에서 똥배에 음식이 아니라 복수가 찼다고 말했다. 원인은 신장 이상이었다. 


이제 수술이 끝나면 아직 너무 어린 아들의 콩팥 하나가 사라진다. 목숨이라도 건지는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하나 착잡했던 부모님에게 신장을 살릴 수 있다는 베테랑 의사의 말은 하늘이 준 귀한 선물이었다.


그 전에도 이미 나는 부모님의 애간장을 태운 전적이 있었다. 출생 후 집에 온 첫날 온몸이 누렇게 뜬 채로 쉼 없이 빼액 빼액 울어댔다고 했다. 새벽녘 택시를 붙잡아 도착한 응급실에서 아들의 황달 수치가 심상치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된 부모님은 당장 입원 수속을 밟았다.


미숙했던 젊은 의사가 흰색 침대 시트를 온통 붉게 적신 후에야 아기의 얇은 혈관에 링거가 놓였다. 부모님은 가슴이 찢어졌지만 기도 말고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기도가 통했을까. 샛노랗던 아이의 얼굴은 여러 날이 지나고 나서야 제 빛을 되찾았다.




당연히 내 아이만큼은 건강하기를 바랐다. 어느 부모가 내 새끼 병약하기를 바라겠냐만은 심각한 병치레를 두 차례나 겪은 아빠와 못지않게 연약한 엄마 사이에서 태어날 아이였기에 좀 더 신경 쓰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아내 따라 산부인과라도 가는 날에는 긴장감이 배가 됐다. 출산이 머지않던 어느 날 초음파 사진을 보고 의사가 말했다.


머리 둘레가 좀 큰 것 빼곤 다른 건 다 괜찮아요.

얼마나 큰가요?

3주에서 4주 정도? 근데 별 문제는 없을 거예요. 걱정되시면 몇 주 줄여드릴까요?


의사의 타이핑 몇 번에 숫자가 바뀌었다. 이토록 쉽게 수정이 가능한 수치라면 당장 별 문제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불안감은 여전히 남았다. 태아의 머리 둘레를 측정하는 이유는 두뇌가 너무 크거나 작을 때 성장이나 생명유지에 지장이 있을 우려가 있어 참고하기 위해서라는 내용을 찾고 나서야 걱정을 덜었다. 


그간의 우려가 무색하게 몇 주 뒤 딸아이는 약간의 황달 증상을 제외하고는 큰 문제없이 엄마 뱃속에서 탈출했다. 




체중이 많이 나갑니다. 식이 조절하시고 활동량을 늘려주세요.


출산 후 처음 받은 영유아 건강검진에서 아이의 몸무게 백분위수는 98이었다. 머리 둘레 역시 98, 상위 2% 였다. 큼직한 얼굴에 여기저기 붙어있는 살덩이를 보면서 어느 정도 예상은 했다만 성장곡선 천장에 붙어 있는 점들을 보니 마음이 심란했다. 잘 먹는 게 복이라고는 하지만 방심하다 소아 비만이라도 오면 어쩌나. 아직 많이 어리니 당장 너무 염려 말라는 의사의 위로도 위안이 되지 못했다. 


이어진 세 차례의 건강검진에서도 여전히 몸무게와 머리 둘레는 최상위권을 유지했다. 반면에 그나마 평균선 가까이 걸쳐있던 키는 오히려 점점 내려가 어느새 바닥과 가까워졌다. 커다란 머리에 짧은 팔다리 그리고 볼록 나온 배. 아빠를 꼭 닮은 얼굴로 태어났을 때 짐작은 했지만 아이는 훤칠한 엄마를 두고 굳이 험난한 길을 나서려던 참이었다.




특출 나게 키우겠다는 욕심은 애초에 없었지만 남들 만큼은 해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양 극단을 달리는 지표를 중간쯤으로 조정하고 싶었다. 뼈를 늘리고 줄이는 건 의사의 영역이니 머리 둘레나 키는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살, 살은 빼도록 도와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자, 왼발 그리고 오른발. 한 번씩 번갈아 가며 올려 봐.

양손을 위로 쭉 펴고 이쪽으로 굽히고 또 저쪽으로 굽히고.


성격은 하필 엄마를 꼭 닮아 영락없는 '집순이'인 딸은 고작 집 앞 놀이터 가자는 말에도 손사래를 치는 지박령이었다. 아이의 육신과 영혼은 대부분 전용 면적 59㎡ 안에 머물렀다. 체중이 줄어들 리가 없었다. 맨손 체조라도 함께하자고 달래면 아이는 귀찮은 얼굴로 팔과 다리를 몇 번 쓰윽 움직이더니 얼마나 했다고 이렇게 조른다.


아빠, 이제 간식 먹고 싶어요. 

안 돼. 간식은 맘마 다 먹어야 주는 거야.


먹성 못지않게 승부욕이 뛰어난 딸은 쥐어 짜낸 눈물이 통하지 않자 기어이 밥을 순식간에 쓱싹 처리하고 간식을 먹겠다고 우겼다. 양손 가득 과자를 들고 입가에 부스러기를 묻힌 채 행복하게 웃는 녀석의 얼굴을 보니 또 사랑스러운 건 어쩔 수 없다만 과체중은 딸의 숙명임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체념도 들었다.




아이가 자라면서 부모가 챙겨야 할 발달 가짓수는 점차 늘어난다. 각 과정은 때로는 또래보다 빨리 때로는 또래에 비해 느리게 진행되는데 아이를 보육기관에 맡긴 순간부터 부모는 그 차이를 좀 더 예의 주시하게 된다. 집에만 있을 때는 '귀엽잖아'라며 넘겼던 딸의 작은 키가 같은 반 친구와 머리 하나 정도 차이가 난다는 걸 눈으로 확인하면 당장 칼슘이 풍부한 멸치나 치즈를 찾아 먹여야 하나 생각이 든다. 이제 겨우 '엄마, 아빠'를 더듬거리며 말하고 있는데 정확한 발음으로 말하는 또 다른 친구를 발견한 날이면 집에 돌아와 먼지 쌓인 동화책을 꺼내 읽어줘야 마음이 좀 놓였다.


평생 남들과 다르게 살고 싶었던 나조차 어느새 내 딸에게는 '남들처럼만 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허나 기댈 곳 없는 무신론자 아빠를 만난 탓에 소원은 이뤄질 리가 없었고 아이는 늘 발달 개월 수 끄트머리에나 가서야 겨우 턱걸이로 임무(?)를 완수했다.




어머, 그 집 아이는 어쩜 그리 말을 잘해요? 

아녜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몇 단어 말 못 했어요.


반찬거리를 사러 아이와 함께 집 근처 슈퍼마켓에 가던 밤, 간만의 외출에 들떠 조잘거리던 딸을 유심히 살피던 아주머니가 물었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언어 클리닉을 가볼까 고민했던 아이였다. 언어 이해력은 좋은 편이니 기다려보자는 의사의 조언을 믿고 기다렸더니 어느새 아이의 입에서 긴 문장이 주르륵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말문이 트일 수나 있으려나 걱정하던 몇 달 전 입방정이 부끄러울 만큼 아이는 각종 표현을 흡수해 술술 떠들기 시작했다. 감당하기 힘들 정도의 빠르기로 쉼 없이. 아이는 아빠의 걱정을 비웃듯 쑥쑥 자라고 있었다.




돌이켜 보니 나란 인간이야말로 얼마나 평균치에 근접해 지내왔는가 의문이 든다. 앞서 말했듯 건강은 태생적으로 약했고 키는 중2 때 잠깐 중간 정도 갔던 것을 제외하면 늘 작은 편이었다. 끈기도 부족해 작은 이유를 들어 포기하기도 여러 번이었다.

반면 조금 잘 돌아가는 머리 덕분에 노력 대비 좋은 결과를 얻을 때가 있었다. 나쁘지 않은 말주변으로 사람들과 잘 어울리기도 했다. 부족한 끈기 대신 얻은 지독한 오기는 힘들 때 악착같이 버틸 수 있던 원동력이었다.


풍족함과 결핍이 다채롭게 뒤섞인 결과 무탈하고 평범한 내 인생이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자 자식이 '모든' 분야에서 그저 평균만 하기를 바랐던 마음이 얼마나 과욕인지 알게 됐다. 삶의 모든 순간에서 평균적이었던 사람이 있었던가 찾아보면 딱히 떠오르는 인물도 없었다. 




자녀가 가장 '보통'의 존재로 자라길 바라는 마음이야말로 실은 얼마나 '특별'한 욕심이었는지, 모자란 아빠는 딸과 몇 년을 부대끼고 나서야 조금 알게 됐다.

그리고 이제야 딸이 커가는 과정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즐기며 여유를 찾아가는 중이다.

여전히 가끔은 머리 하나 더 큰 친구가 부럽기도 하고 한글과 산수를 언제 시작해야 하는지 주변을 기웃거릴 때도 있긴 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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