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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각 Oct 24. 2021

하나만으로도 벅찬데요

지나치게 궁금한 사람들을 대처하는 법

타파스가 맛있다고 소문나 들른 멜버른의 술집은 분위기까지 좋았다. 편안하고 낭만적인 분위기에 맛있는 술과 안주까지. 신혼여행을 마무리하기에 충분히 멋진 장소였다. 술에 취하고 분위기에 취해 살아온 이야기와 살아갈 이야기를 나눴다. 그중 하나가 가족계획이었다.


임신은 여자에게 부담이 크니까 최대한 네 의견에 맞출게. 딩크도 상관없어.

그래도 하나는 낳고 싶어. 가임기는 정해져 있는데 뒤늦게 마음이 변했다가 나중에 후회하긴 싫거든.


결혼하고 나서 가장 처음 마주친 중대한 결정이었다. 고민의 고민 끝에 수많은 대화가 오고 갔다. 우리는 1년의 신혼생활을 즐긴 후 아이 한 명을 갖기로 합의했다. 




우리는 아이를 하나만 낳고 싶은 각자의 이유가 있었다. 나는 아이에게 형제를 물려주고 싶지 않았다. 성장 과정에서 애정 욕구가 상당한 동생의 존재는 늘 부담이자 스트레스였다. 부모의 사랑과 지원을 얻기 위해 나를 공격하는 경우가 많았고 그 과정에서 험한 말들이 숱하게 오고 갔다. 함께 살던 예전에 비해 떨어져 사는 지금은 많이 좋아졌지만 여전히 친해졌다고 하기에는 무리다. 혹시 내 자식이 나와 같은 불행을 갖고 산다면 너무 속상할 것 같았다.


아내는 언니와 주변의 조언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두 명 이상의 아이를 낳으면 개인적인 시간을 확보하기 불가능하다는 얘기를 들었고 직접 봤다. 일에 대한 욕심이 많은 아내에게 그 광경은 상당한 압박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또한 좋지 못한 체력 때문에 아이를 낳을수록 건강이 망가질 것이라는 두려움도 컸다.


무엇보다 우리는 부부가 따로 또 같이 행복하게 즐기는 삶을 지속하고 싶었다. 주변의 도움이 전무한 상황에서 많은 자녀 수는 걸림돌이 될 것이 뻔했다.




언제 그리고 몇 명의 자녀를 낳을 것인지는 부부의 가치관, 건강, 연령, 소득, 직업, 환경 등에 따라 천차만별로 달라진다. 수없이 많은 개별적 상황을 검토한 결과 부부는 자녀 계획을 세운다. 지극히 사적인 결정 과정이기에 정답이 있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를 공적 담론(?)의 차원으로 확장하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가만히 있는 사람에게 자녀 현황과 계획을 물은 뒤 본인의 가치관과 일치하지 않는 경우 훈수를 둔다. 문제는 대부분 듣는 이의 입장과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맹목적이고 일방적인 내용인 경우가 많다는 데 있다.


나 역시 제법 많은 조언(?)을 들었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혼자 키우면 아이가 외롭다는 것이다. 또한 외동이면 부모가 놀아줘야 하는데 둘부터는 키워놓으면 지들끼리 놀아 덜 힘들다는 것도 있었다. 심지어 딱 하나 낳았는데 사고라도 생기면 어떻게 만회할 거냐는 얘기까지 들었다. 아이가 둘 있다고 스페어타이어 마냥 교체가 가능한지 궁금했지만 버릇없다고 할까 봐 묻지는 않았다. 어쨌든 이 정도 선에서의 이야기들은 좋게 생각하면 걱정해주는 거라고 넘길 수 있어 들을만했다.


하지만 사교성이 떨어진다거나 이기적으로 자랄 거다 같은 말을 듣다 보면 이 사람이 조언을 하는 건지 조언을 가장한 악담을 퍼붓는 건지 의아할 때가 많았다. 




흥미로운 건 외동의 안 좋은 면을 부각하며 훈수를 두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정작 평소 본인의 육아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감정을 토로할 때가 많았다는 사실이다. 쉴 시간이 없다, 혼이 빠져나간다, 체력이 바닥났다 등. 어떻게 보면 아이 한 명만 낳겠다고 결심하는데 큰 영향을 끼쳤던 내용의 말을 하는 사람들이 주로 둘째를 권했다. 내가 정말 싫어서 한 번 '엿 먹어라' 하는 건가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런데 자식 하나만 낳고 사는 지인들과 대화하다 보면 나만의 경험은 아닌 듯했다. 공통적으로 애 키우는데 도움 하나 안 주고 일상에 불만이 많은 사람들이 잔소리를 그렇게 해댄다는 것이다. 대체 무엇이 그들을 잔소리 기계로 만든 걸까. 우리는 마침 할 일도 많지 않아 머리를 맞대고 그 이유를 찾아봤다.


자기 뜻대로 애를 낳지 못해서가 아닐까. 


주변에서 자식은 둘 이상 낳아야 된다 이런 이야기 많이 들으니까?


그렇지. 남의 말 듣고 낳았는데 너무 힘들면 더 억울하잖아. 그렇다고 무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인생 잘못 살았다고 말하기는 억울하니까. 내 인생이 잘못되지 않으려면 나처럼 살지 않는 누군가의 인생이 잘못돼야 하는 거지.


그럴듯한 의견이 오고 간 끝에 우리는 결국 '의지대로 살지 못한 이들이 불행을 인정하지 못하고 자신과 다른 선택을 한 사람에게 항복 선언을 받아 행복하다고 위안 삼으려 하는 과정'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증명할 수 있을까'란 질문에 '아무렴 어때. 어차피 먼저 스트레스 준 사람들 뒷담화하는 건데'라고 답했다.




그러고 보니 조언을 해주는 이들이 자신들처럼 살면 얼마나 행복한지 보여주는 경우는 없었다. 그저 둘 이상은 행복이며 하나 이하는 불행이라는 종교 교리 같은 가치관을 반복할 뿐이었다. 반면 행복하게 잘 사는 다자녀 가정을 지켜보면 본인들 인생을 즐기는 시간도 부족해 남에게 참견할 여유가 없었다.


나름의 결론을 내린 이후에는 비슷한 훈수가 들리면 속으로 '불행한 사람의 넋두리구나'하고 넘긴다. 이왕이면 '지금이라도 시도해볼까요' 혹은 '이미 늦은 것 같아 속상해요'라는 느낌을 전해주면 더욱 효과적이었다. 이런 반응을 접하면 대부분이 이제 사명을 다했다는 듯 만족스러운 웃음을 띄며 화제를 돌렸다.


하지만 이런 꼼수로 넘기기에는 아직 들어야 하는 잔소리가 너무 많이 남았다. 도망치고 싶지만 벗어나기에는 아직 상대적으로 어린 나이와 절대적으로 낮은 사회적 위치가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결국 먼 산을 바라보고 나직이 속삭이며 속상한 마음을 달랠 수밖에. 


'거 참, 남이사. 신경 좀 꺼주세요. 제발.'


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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