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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각 Oct 18. 2021

딸을 키울수록
난 다시 아들이 된다

아들의 육아 휴직을 부모님은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

사돈께서 봐주신다는 이야기는 없으시고? 


아들이 몇 달 뒤면 육아휴직을 할 것이라는 이야기에 엄마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 채 물었다. 급한 일로 외출한 며느리 대신 손녀를 돌보기 위해 먼 길 달려온 본인에게 이런 속상한(?) 얘기나 들려주느냐는 마음도 있지 않았을까 싶다. 

곧이어 집에 돌아온 아내가 손주 둘을 돌보느라 몸이 상한 장모님 근황을 전하며 우리 부부가 번갈아 휴직하며 아이를 키울 수밖에 없는 상황을 설명했다. 


한참을 말없이 내려다보던 엄마는, 남들 다 남자가 돈 벌고 여자가 애 키우는데 너희들만 특이하게 살려고 한다며 타박했다. 

맞벌이 시대라 같이 벌고 같이 키우는 게 당연하다는 내 얘기와 친정 엄마라는 이유로 쉼 없이 손주들 돌보다 건강이 상하는 것은 원치 않는다는 아내의 말 그리고 내 아들이 애 본다고 집에서 고생하는 건 싫다는 엄마의 말이 켜켜이 쌓이며 언성이 높아졌다. 


그렇게 서먹하게 헤어진 뒤 아내와 엄마는 오늘 일은 오늘로 끝내자는 화해인지 합의인지 모를 애매한 대화로 이 날을 덮었다.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아들이 집에서 애를 보겠다는 말을 이해시키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힘들었다.




백수 아들은 뭐 하시나. 


엄마로부터 뒤늦게 아들의 육아휴직 얘기를 전해 들은 아빠는 어느 순간부터 아들에게 '백수'라는 호칭을 붙였다. 집에서 애'나' 보는 줄 알고 평생 살아오셨을 그 시절 남자로서 나름 속상함을 감추고 위트 있게 아들을 대하려는 노력으로 생각하려고 애썼지만 들을 때마다 기분이 안 좋은 것은 사실이었다. 


'백수'라는 한 단어로 순식간에 좁은 집에서 하루 종일 애와 고군분투하는 나의 육아생활은 무가치한 행동으로 격하됐다. 무엇보다 육아휴직을 편히 쉬고 놀다 오는 것처럼 여기며 비난하던 손가락질 사이에 아빠 손가락마저 포함되어 있는 것 같아 상처가 더 컸다. 


참다못한 아들이 항의하고 나서야 아빠는 '백수'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지만 근본적인 생각이 쉽게 바뀔 리가 없었다. 

한 분은 너무 힘들어서 한 분은 너무 쉬워 보여서, 부모님은 모순적으로 보이는 각자의 이유로 내 결정을 탐탁지 않아했다. 

아들에 대한 속상함이 며느리에 대한 미움으로 발전하지 않기만을 바라며 나는 그저 부모님의 심기를 더 면밀히 살필 뿐이었다.




엄마도 너처럼 키웠어야 했나 봐. 


여느 때처럼 영상통화로 손녀 얼굴 보느라 바쁜 엄마가 문득 딸과 놀고 있는 내 모습을 보며 말했다. 

네가 잘 놀아줘서 그런지 네 딸 표정이 참 행복해 보인다고. 난 집안일하느라 바빠 너희들 어릴 때 잘 놀아주지 못했다면서. 

무심해 보였던 엄마는 사실 열심히 내 육아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생각보단 잘 해나가 보이는 아들을 그날은 칭찬해줘야겠다고 생각한 듯했다. 쑥스러워진 나는 대충 얼버무리며 통화를 끝냈지만 가슴 한편에 차곡히 쌓아뒀던 안 좋은 감정들이 스르륵 사라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날부터 엄마와는 좀 더 편히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동안 감춰뒀던 육아 고충을 털어놓기 시작한 것도 이 즈음이었다. 

엄마는 답이 될지 모르겠다며 나를 키울 때 좋았거나 아쉬웠던 순간을 들려줬다. 나는 특히 엄마의 아쉬웠던 때의 이야기를 듣는 게 좋았다. 엄마가 많이 아쉬워했던 순간이 나를 많이 사랑했던 때였음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딸을 키울수록 육아 선배였던 엄마와의 이야기가 늘었고 서로에 대한 이해의 폭도 점점 넓어졌다.




하지만 엄마와 달리 아빠에게 여전히 내 육아휴직은 탐탁지 않은 결정이다. 

한창 재롱떠는 손녀 보는 맛에 산다지만 그 옆에 꼭 당신의 아들이 붙어있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것도 같다. 가뜩이나 미지근해 불만이었던 아들의 직장생활이 육아휴직으로 절단이 났다는 생각까지 든다면 대놓고 화를 내지 않는 것만으로도 아빠는 내게 최선을 다하는 중일 것이다. 


그렇다. 여태까지 이 모든 서술이 가정법으로 쓰인 것 자체가 아직 아빠와는 제대로 된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다는 방증이다. 

지금 나는 육아 경험이 전무한 고집 센 옛날 남자에게 현 상황을 잘 이해시킬 적당한 대화법을 찾지 못한 상태다. 갈등을 피하기 위해 가끔 아빠의 얼굴에 스치는 실망스러운 표정을 애써 모른 채 하는 정도가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이다. 


이제 남은 휴직 기간은 일 년 남짓. 

그동안 내 딸이 얼마나 예쁘게 자랄지 궁금한 만큼이나 아빠가 내 결정에 대한 태도를 바꿀 수 있을지도 기대된다. 

아무리 칭찬받을 생각 없이 내린 결정이라도 가족이 지지해주는 만큼 든든한 일은 없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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