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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각 Oct 19. 2021

나는 이렇게
TV 전쟁에서 패배했다

TV 없는 육아가 과연 가능할까

어떤 장소에서 누가 주도권을 쥐고 있는지가 궁금하다면 그곳에서 오가는 대화에 잠시 귀를 기울여 보자. 가장 힘이 센 사람의 관심사가 반영된 이야기가 제일 많이 들리기 마련이다. 학교에서는 교장, 교감, 평교사 그리고 반장과 일진 등의 순서로 발언권이 세다. 회사에서는 단연 직급의 순서가 발언권을 정한다. 최고 관리자는 쉼 없이 떠들고 요구하며 말단 사원은 듣고 기억해서 적느라 정신이 없다.


가구 당 출산율이 한 명도 안 되는 나라에서 가정 내 왕은 단연코 아이다. 출산 이후 그 집의 대화 수준은 일순간 퇴화한 뒤 아이의 어휘 구사력에 맞춰 조금씩 발전해 나간다. 부부는 핏덩이가 뱉어내는 옹알이의 의중을 파악하느라 온 정신을 쏟다가 말이 트이는 순간 자신들이 오랫동안 쓰지 않았던 단어를 섞어 대화를 시작한다. 


밥은 맘마, 소변은 쉬야, 대변은 응가. 

애 때문에 쓰던 단어는 어느새 어른의 말에도 영향을 끼쳐 마흔을 앞둔 남편이 아내에게 잠깐 '응가' 좀 싸고 오겠다는 망측한 표현을 구사하기에 이르기도 한다.




직장을 다니며 퇴근 후나 주말에 잠시 아이를 봐줄 때만 해도 이런 변화는 재미있는 해프닝에 가까웠다. 하지만 휴직과 함께 아이와 온종일 붙어 다니면서 그 감정도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무조건 떼를 쓰며 뭐든지 안 하는 게 취미이자 특기인 녀석을 어르고 달랜다고 맘마 안 먹으면 까까 안 줄 거고 양치 안 하면 충치 괴물이 이 놈 하며 페티 공주는 뽀로로 왕자의 뽀뽀를 받고 행복하게 살았다는 이야기를 매일 같이 반복했다. 


재미는 곧 무료함으로 바뀌었고 머지않아 감옥에 갇힌 죄수처럼 갑갑하다는 생각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라디오라도 켜야 하나.


입에서 파란 연기를 내뿜으며 지네를 물리쳐 은혜를 갚은 두꺼비 이야기를 열 번쯤 읽어주고 금 동아줄을 받아 해님과 달님이 된 오누이와 달리 왜 호랑이는 썩은 밧줄을 잡게 됐는가에 대한 질문에 스무 번쯤 대답하고 있자 문득 떠오른 생각이었다. 

쉼 없이 떠드느라 목이 아픈데도 하루 종일 입 꼭 다물고 사는 듯한 괴로움. 아이에게 '구연'하느라 지인과의 '대화'를 잃어버린 사람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이었다. 


그렇다고 다른 이들에게 시간을 내달라고 부탁하기도 쉽지 않았다.  통근 시간이 살인적인 아내는 퇴근해서 밥 먹고 집안일 좀 하면 잘 시간이었다. 친구들은 각자 먼 곳에서 아이들을 키우느라 일 년에 한 번 만나기도 어려웠고, 코로나 19가 기승을 부리면서 이마저도 아예 불가능해졌다.

아내나 친구 대신 떠들어 줄 무언가라도 찾겠다는 생각 끝에 잡은 지푸라기가 라디오였다.




하지만 라디오의 효용성은 오래가지 못했다. 사람의 형체 없는 목소리만으로는 인간을 갈구하는 휴머니즘(?)을 충족시키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왜 영상통화가 가능한 시대에도 사람들은 약속을 잡고 만나는지 알 수 있었다. 

게다가 아이는 아빠와 자신밖에 없는 집에 낯선 목소리가 들리는 이유를 알기에 많이 어렸다. 맘에 안 드는 DJ의 멘트가 나올 때면 연신 무섭다며 품에 안겨 칭얼거렸다. 

이미 마음이 무거운 아빠에게 묵직한 아이의 몸무게까지 더해졌다.


라디오를 계속 켤 수 없다면 다른 방법은 단 하나였다. 바로 그 악명 높은 TV였다. 

거의 모든 육아 지침서가 유아의 발달에 TV가 얼마나 나쁜 영향을 끼친다고 말하는지 대부분의 부모는 알고 있다. 하지 말라면 하는 법이 없는 아내는 당연히 일 년 동안 TV의 존재를 잊고 살았다. 퇴근 후 남편과 저녁을 먹을 때 잠시 리모컨을 찾을까 말까였다. 


반면 나는 일생을 반골 기질로 살아왔으며 취미라고는 고리타분하게 독서와 TV 시청이 전부였다. 아이의 책을 읽어 주며 내 책을 읽는 건 불가능했다. '이러면 안 되는데' 하면서도 자꾸 거실에서 잠자고 있던 TV에 눈길이 가기 시작했다. 수없이 다짐했지만 평소 내 의지가 얼마나 박약했는지 잘 알고 있었다. 머지않아 악마(?)와 손을 잡게 될 것이라는 무력감과 패배감이 엄습했다. 


아내는 개운치 않은 얼굴로 남편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아이와 혼자 있는 집 안의 적막이 얼마나 힘든지 잘 알고 있던 선배의 배려였다. 

유혹을 이기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히며 나는 아내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그래도 양심은 있다고 처음에는 외신을 틀었다. 'CNN 인터내셔널'이나 'BBC 월드'처럼 듣기만 해도 품격 있는 채널 말이다. 아빠는 세계 각국 현황을 파악하며 식견을 높이고 딸은 일찍부터 자연스럽게 외국어를 접하는 교육의 장이 될 거라고 위안하며. 

더 솔직하게는 모르는 말이 들리면 딸이 TV에 관심이 없지 않을까 생각했고 예상은 적중했다. 하지만 슬프게도 나 역시 모르는 말로 가득한 방송에 급격히 흥미를 잃게 되었다.


육아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은 어떨까. 


초보 아빠가 몇 년을 주 양육자로 살기 위해서는 정보가 필요하며 이 다큐멘터리가 마른땅에 물을 적실 것이라 믿으며. 하지만 이 역시 오래가지 못했다. 하루 종일 내 새끼 붙잡고 사는 것만으로 힘든데 남의 새끼들 키우는 것까지 보자니 스트레스가 더 심해졌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중간중간 전문가의 조언은 마치 '넌 지금 네 딸을 잘못 키우는 중'이라고 지적하는 것만 같아 마음이 더 무거워졌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어영부영 시간은 흘렀고 집에서 TV 소리가 들리는 시간이 점차 늘어났다. 채널도 뉴스부터 예능까지 다양했다. 뉴스보다 예능 보는 시간이 훨씬 많았지만. 

그동안 뒤뚱뒤뚱 걷던 딸아이는 훌쩍 자라 뜀박질을 시작했다. 뜻을 알기 힘들었던 옹알이도 단어 몇 개로, 단어들은 곧 문장으로 발전했다. 


그렇게 부쩍 자란 아이가 어느 날 또박또박 아빠에게 자신의 권리를 주장했다. 

나. 도. 티. 비.


아빠가 틀어 놓은 TV를 아이도 곁눈질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유아용으로 제작된 콘텐츠를 허락하는가는 또 다른 문제였다. 할 수 있다면 최대한 늦게 보여주고 싶었다. 

하지만 딸의 육체와 정신은 하루가 다르게 자라고 있었고 활동량도 그에 맞게 크게 늘었다. 그럼에도 아직 부모 없이는 잠시도 혼자 놀기 싫은 어린 아이기도 했다. 집안일을 하는 동시에 아이와 놀아주는 건 불가능했다.




아빠가 집안일하는 동안만 뽀로로 보는 거야~.


시도 때도 없이 놀자고 조르는 딸의 요구만 들어주기에는 집 상태가 엉망이었다. 빨래가 쌓여있고 설거지거리는 가득하며 바닥에 먼지도 수북했다. 그렇다고 아빠와 놀고 싶은, 아이로서는 당연한 요구사항에 귀찮다는 이유로 화를 내는 것도 맞지 않았다. 차라리 TV를 틀어줄 때 틀어주고 나머지 시간에 집중해서 놀아주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인생이 계획대로 풀릴 리는 없는 법. 뽀로로 한 두 편만 보여줘도 즐거워하던 딸은 점차 '하나 더, 하나 더' 하며 요구를 늘리기 시작했다. 


이제 그만 보자.

싫어.

자꾸 떼쓰면 안 돼요!

아빠 미워. 저리 가.


목소리가 점점 커지며 결국 아이가 눈물을 터뜨렸다. 


어떤 날은 집안일을 다 못 마쳐서, 어떤 날은 몸이 아파서, 또 가끔은 딸에게 잘 못해준 것 같아 미안해서 약속했던 시간보다 오래 TV를 보여주는 날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아이가 시청하는 콘텐츠는 뽀로로에서 콩순이 그리고 시크릿 쥬쥬까지 늘어났다. 매일마다 '이제 그만 보여줄 거'라고 으름장을 놓았지만 공염불에 그쳤다. 아이는 헛구역질을 할 때까지 울었고 결국 못 이기고 다시 틀어주면 천국에 온 듯 행복한 얼굴로 TV를 봤다. 그 표정이 너무 예뻐 단호하게 끊지 못할 때도 있었다. 


동시에 아이가 TV에 빠져있는 시간은 귀한 휴식시간이기도 했다. 특별히 하는 것 없이 옆에 앉아 멍 때리는 것이 전부였지만 그 시간만큼은 육아를 누군가에게 맡긴 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잉여롭게 보낼 수 있었다.


가끔은 걱정되는 마음에 아내와 상의도 했지만 아내라고 딱히 뾰족한 수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힘들다는 자신 대신 급히 휴직을 결정한 남편에게 무조건 희생을 요구할 만큼 모질지 못했다. 자신도 지금까지 애를 봤다면 TV를 안 보여줄 수 있었을까 의문이 든다고도 했다. 


대신 아내의 퇴근 후에는 TV 시청을 금지하고, 불가피하게 아이에게 TV를 보여준다면 옆에서 말동무라도 되어주어 일방향적인 시청을 막고자 노력했다. 이리저리 현실에 치이다 보면 이것마저 못 지키는 경우가 많았지만 핸드폰으로 시청하는 것만큼은 절대 허락하지 않았다. 


최소한 TV는 집에 있을 때만 볼 수 있다고 생각하게끔 하자. 

아내와 수차례 대화 끝에 정한 마지노선이었다.




부모의 이런 속 타는 마음도 몰라주고 오늘도 딸은 눈뜨면 바로 티브이, 티브이 하고 조른다. 가끔은 그만 보겠다는 말이 없어 '아빠도 좀 보자'며 다투는 민망한 장면이 연출될 때도 있다. 그럴 때마다 못난 아빠 때문에 아이가 제대로 크지 못하는 건 아닌지 불안하고 미안하다. 그렇다고 다시 TV 없던 시절로 돌아갈 자신도 없다. 이미 딸아이는 TV의 재미에 푹 빠졌고 나 역시 보육기관이나 양가 부모님의 도움 없이 2년 가까이 견딜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가 TV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걱정하면서도 왜 TV를 끊지 못할까. 가끔은 자책하고 때로는 궁금했다. 아내를 제외하고는 성인을 만나기 극히 어려운 '전업주부'의 외로움 때문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나 역시 사회적 동물로서 외로움을 못 참는 나약한 인간에 불과했다. 현실이 아닌 걸 뻔히 알면서도 화면 속 인물들에게 혼잣말이라도 건네야 조금은 힘을 낼 수 있는 인간. 그래야 동심으로'만' 가득 찬 좁은 집에 성인의 세계로 통하는 자그마한 숨구멍이라도 낼 수 있는 부족한 어른.




결국 죄 많은 아빠가 딸에게 기대하는 건 아이가 가진 '무한한 회복탄력성'이다. 

컨디션이 너무 안 좋은 날 자포자기하는 마음으로 하루 종일 TV를 보여주려 해도 얼마 안 가 '아빠랑 노는 게 더 재밌다'며 안기고, 부모가 평소 쓰지 않는 말을 TV에서 배워 능숙하게 구사하는 모습을 볼 때면 아빠의 부족한 점을 딸이 보완하며 알아서 잘 커주는 것 같아 미안하면서도 고맙다. 

 

올해가 지나고 내년이 오면 딸아이는 조금 더 의젓한(?) 유치원생이 된다. 좀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하다 보면 이내 TV 화면 속 작은 세상이 잊히지 않을까 상상하던 찰나, 아빠를 돌아보는 딸내미가 외친다.


아빠, 티브이 더 보여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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