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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각 Oct 21. 2021

당신들의 천국

가격표로 가득한 행복의 나라 탈출기

휴일이면 우리 가족은 천국에 간다. 거대한 유리천장 아래 줄지어 자리한 깔끔하고도 화려한 상점들. 옷, 잡화, 커피숍, 푸드코트 게다가 장난감 가게까지. 아이는 신이 나서 부모도 잊은 채 매장 구석구석 탐험하느라 정신이 없고 아내와 나는 덕분에 잠시나마 고된 육아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곳으로. 


입장과 동시에 부모로서의 책임감은 잠시 잊을 수 있는 이 행복의 공간을 사람들은 쇼핑몰이라고 불렀다.




아이와 외출하는 일은 고통의 연속이다. 기저귀, 물티슈, 물병에 간식까지. 연애나 신혼 시절에는 생각해본 적 없던 잡스럽고 다양한 물건들을 챙겨야 한다. 갑자기 마음이 바뀌어 나가지 않겠다고 떼쓰는 아이를 어르고 달래며 하나하나 옷을 입히는 일도 녹록지 않다. 


모든 과정을 어렵게 마쳐도 돌발 상황이 벌어지면 즉각 집으로 돌아와야 한다. 날씨가 좋아 콧바람 좀 쐬겠다고 들른 공원에서 응가를 지린 아이와 서둘러 집에 돌아오기도 여러 번이었다. 기저귀를 갈 만한 마땅한 장소가 없었기 때문이다. 거추장스러운 일을 몇 번 겪다 보면 아이가 좀 더 클 때까지 외출은 포기해야겠다는 마음이 절로 생긴다.




아이 때문에 비자발적인 감금 생활 중이던 우리 같은 부모들에게 쇼핑몰이 축복인 이유다. 그곳에는 거대 자본만이 제공할 수 있는 편리함과 안전함이 있다. 널따란 통로는 아이가 마음 놓고 다녀도 위험한 것이 많지 않았다. 오줌이 마려우면 가족 화장실, 배가 고프면 유아용 의자가 구비된 푸드 코트가 가까이 있었다. 동네에서 보기 힘든 다양한 상품들에 눈길을 빼앗기다 보면 하루가 '순삭' 됐다. 매주 '뭘 하며 시간을 때우나' 했던 시절이 언제 있었나 싶을 정도였다.


집에서 비교적 가까운 쇼핑몰을 구경한 뒤 아이는 한동안 '큰 마트 가자, 큰 마트 가자' 노래를 불렀다. 하긴 쇼핑몰에는 대부분 마트가 붙어있으니 틀린 말도 아니었다. 아이를 놀게 하는 김에 장도 볼 겸 나와 아내는 흔쾌히 자동차에 시동을 걸어 행복의 나라로 향했다.


그렇게 점차 우리 가족은 자본주의 국가의 소비 지향적 구성원으로 남부끄럽지 않게 잘 자라고 있었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먹다 보면 물리기 마련인 걸까. 여느 때처럼 '큰 마트'에 가자며 조르던 아이의 말이 이유 없이 내키지 않았다. 마트 대신 산책 갈까 꾀어 보려는 아빠 말에 아이는 단호하게 싫어를 외쳤다. 하는 수 없이 짐을 챙기고 옷을 갈아 입힌 뒤 꽉 막힌 차량 행렬에 차 한 대를 보탰다. 


옷 가게로 들어가서 드레스를 만지고 신발 가게에서는 구두 사달라고 조르다가 결국 장난감 가게로 향해 공주 인형을 찾아서 "나도 갖고 싶은데."를 외치겠지. 아이는 예상대로 이동하며 '이것 사줘' '저것 갖고 싶다'라고 졸랐다. 우리는 '이건 내려놓으세요' '저건 다음에'라며 말렸고. 하루 종일 사니 마니 실랑이 끝에 아이 손에 적당한 가격대의 장난감이 들려 있었다. 


뭐든지 자유롭게 보고 느끼며 즐길 수 있을 것 같던 꿈의 나라는 허상이었다. 모든 대상에 가격표가 붙어 있는 공간에서 우리 가족이 내릴 수 있는 결정이라고는 고작 그것을 살지 혹은 사지 않을지 정도밖에 없었다. 양자택일의 경험이 반복되면서 슬슬 이곳도 지루해지고 있었다.




며칠 후 간식을 준다고 꾀어 오랜만에 아이와 집 가까운 곳에 산책을 나왔다. 아빠와 엄마 손을 하나씩 나눠 잡고 무심코 걷던 아이가 갑자기 손을 뿌리치더니 주저앉아 무언가 유심히 살피기 시작했다. 강아지풀이었다. 나 어렸을 때처럼 여전히 보들보들 동글동글 귀여운 그 모습 그대로였다. 딸은 손등을 내밀어 강아지풀에 비벼대며 연신 '간지러워'라며 웃었다. 아빠도 해보란 딸의 말을 듣고 나 역시 손등을 갖다 대어 '간지럽네'하고 웃었다. 


풀밭 구석에서는 귀뚜라미가 귀뚤귀뚤하며 울고 있었다. 후덥지근한 바람이 선선해지더니 어느덧 가을이 오고 있었다. 몸에 열이 많아 여름에 외출을 꺼렸던 아이가 오늘은 땀이 나지 않는다며 좋아했다. 사시사철 비슷한 온도와 습도 그리고 모습으로 유지되는 쇼핑몰 안과는 다르게 아이는 계절의 변화를 만끽하고 있었다. 뭔가 사달라고 하거나 사면 안 된다는 이야기 말고도 오늘은 아빠와 딸이 할 이야기가 참 많았다.




그럼에도 여전히 우리 가족은 쇼핑몰을 간다. 너무 덥거나 무척 추운 날 쾌적한 실내가 주는 이점을 포기하기 어렵다. 그곳에서만 구할 수 있는 특이하거나 예쁜 물건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생각이 좀 바뀌었다고 당장 자연인처럼 산속으로 들어가 텃밭을 가꾸고 열매를 따면서 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직 자본이 주는 편리함과 화려함을 완전히 버릴 정도로 욕망을 없애지는 못했다.


다만 관점이 바뀌면서 방문 횟수는 확연히 줄었다. 목적 없이 시간을 때우려고 습관적으로 아이를 데려가는 일도 없어졌다. 꼭 가야만 하는 이유를 찾지 못한다면 아이의 외출은 집 근처 산책로나 공원에서 이뤄졌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고 어느새 딸 역시 '큰 마트' 가자는 말을 하지 않았다. 


막 첫발을 뗀 이 작지만 큰 결심이 조금은 오래 지속됐으면 좋겠다. 그 시간 동안 아이에게 돈 없이 느낄 수 있는 여러 가지 경험을 함께 나누고 싶다. 그렇게 한 걸음 씩 나아가며 소비자가 아닌 한 개인으로서 살아가는 방법을 배워간다면 더할 나위 없이 뿌듯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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