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空間): '자리'에 대해 어떤 값을 치르는 사람

by 호시



1. 객관식의 세계: 관객으로서 무엇을 보고, 어디에서 보고 싶은지에 대한 값 치르기


수도권이라는 거대한 로컬(서울 홍대)과 지방이라는 또 다른 고요한 로컬(전남 강진).

두 세계를 오가며 일하다 보니, 내가 몸담은 공간들이 마치 같은 본질을 묻고 있으면서도 나에게 전혀 다른 형식의 답안지를 요구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나는 명확한 사지선다 혹은 오지선다의 선택지와 함께 제시되는 객관식 문제 같았고, 다른 하나는 문제보다 답안지의 여백이 훨씬 큰 서술형 주관식 문제 같았다.


서울에서 내가 공간에 머무는 방식은 마치 객관식 문제의 정답을 고르는 일과 비슷했다. 브랜드마다 톤에 맞춰 잘 꾸려진 공유 오피스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적정한 공간의 온도와 잘 세팅된 자리들이 나를 맞이했다. 객관식의 세계에는 '제시된 선택지 안에 반드시 정답이 있다'는 전제가 존재한다. 그래서 그 선택지들 앞에서는 '오답을 고르면 어떡하지'에서 시작되는 묘한 압박감이 늘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실제로 공유 오피스 계약을 앞두고 내 앞엔 브랜드 이미지부터 위치, 그곳을 이용하는 주 이용 고객들의 카테고리(이후에 느슨한 연대를 위한 프로그램을 통해 좋은 인연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와 분위기, 이용 요금 등이 선택지의 주 내용이 되어 서너 군데의 공간들이 옵션으로 주어졌었다.


비용이 따라붙는 이 객관식 문제 앞에서 나는 물론 오답에 대한 부담도 있었지만 꽤 즐거웠다. 스스로의 취향과 지향점, 이른바 '추구미'가 확실한 사람들이라면 이 즐거움에 분명 공감할 것이다. 기준이 명확한 사람에게 이 선택지들은 피로감을 안겨주는 고민거리가 아니라, 명쾌한 시원함을 가져다주는 소거법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나의 바운더리에 들어가지 않는 것들을 빠르게 걸러낸다거나, 아주 명확하게 단 하나의 정답만이 눈에 딱! 들어왔을 때 경험할 수 있는 특유의 속도감과 템포는 분명 굉장한 즐거움 중 하나다.


서울에서 나는 주로, 마치 잘 준비된 공연을 보러 가기 위해 표를 예매하는 '관객'처럼 공간을 누리고 경험했다. 나의 안목과 취향의 연장선상에서 내가 무엇을 보고, 어디에서 보고 싶은지를 결정한 '바로 그 자리'에 대한 비용을 지불하는 일과 매우 닮아 있었다. 돌이켜보면, 이 부분은 내 커리어의 생애주기와도 긴밀히 맞닿아 있기도 했다. 당시의 나는 안목을 기르며, 타인이 치열하게 세팅해 둔 무대를 감상하고 내 안에서 수없이 굴려보는 '관객'의 포지션에서의 기회가 더 많을 수밖에 없는 시기를 지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2. 주관식의 세계: 창작자로서 어떤 이야기와 무대를 지을지에 대한 값 치르기


강진이라는 로컬에서 마주했던 나의 공간은 반드시 '적어 내려 가야 하는' 서술형 주관식 문제였다. 비파산 아래 자리 잡은 낡은 방앗간의 문을 처음 열고 들어섰을 때, 켜켜이 쌓인 잡동사니들과 함께 한동안 비어있었던 공간이 뿜어내는 특유의 내음이 아직도 생생하다.


학창 시절에 매 시험마다 들었던 '뭐라도 적어야 부분 점수라도 준다'는 선생님들의 조언 때문인지, 배점이 큰 서술형 주관식 문제는 답을 아는가 모르는가 와는 무관하게 늘 그 앞에서 침을 꼴깍 삼키게 만든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아득해지던 그 오래된 방앗간 앞에서, '이곳을 도대체 어떤 공간으로 만들 수 있지'하고 상상하는 것조차 막막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시작이 반이라고 했던가. 약간의 긴장감이 함께하는 막막함에 일단 발을 담그니, 예상하지 못했던 벅찬 순간들이 튀어 오르기 시작했다. 그간 부지런히도 캡처하고 모아두었던 이미지들을 한데 펼쳐놓고 이번 공간을 위한 레퍼런스들을 추려내다 보니, 조금씩 욕심이 나는 부분들과 아쉽지만 과감하게 내려놓아야 할 부분들이 선명하게 구분되었다. 내게 주어진 공간 위로 나의 추구미를 입혔다 지워내기를 반복하며 미팅 자리를 준비하던 시간은, 스스로 '공부'하는 방법을 찾아가던 오래 전의 감각을 깨워내는 과정이기도 했다.


그렇게 나간 미팅에서, 나의 상상이 현장 작업자들의 낯선 전문 용어 장벽을 훌쩍 뛰어넘어 명쾌하게 가닿는다고 느껴지는 순간은 또 다른 기쁨을 내게 선사해 주었다. 그 기쁨은 꽤 오래전 경험했던 기분 좋은 감각을 다시 내 앞으로 소환해 냈다. 대학교 신입생 시절, 전공 원론 수업에는 교수님이 꼭꼭 챙기는 시간이 있었다. 바로 시험 후 첫 수업 시간이었는데, 교수님이 문제마다 가장 훌륭한(?) 답안을 작성한 학생을 앞으로 불러내어 문제를 어떻게 해석했고 어떤 맥락에서 답을 서술했는지를 설명하게 하신 것이다. '아, 이번 문제는 꼭 나를 시켜주셨으면!' 속으로 두근거리며 호명되길 기다리다가 딱! 이름이 불려 동기들 앞에서 신나게 설명해 내고 나면 어찌나 가슴이 뛰고 뿌듯했는지 모른다. 어디서 무엇을 보고,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그 맥락이 내 안에 명확하게 서 있을 때, 남들은 막막해서 당황한다는 그 텅 빈 여백은 언제나 나에게 오히려 가장 즐겁고 수월하게 나의 주도성을 펼칠 수 있는 장이 되었다.


강진에서 자리를, 그러니까 공간을 '만든다'는 것은 서울의 관객 시절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값을 치르는 일이었다. 그것은 내가 세상에 던지고 싶은 이야기를 짓고, 그 이야기를 가장 잘 전달할 수 있는 장소를 고민하고 결정해서, 내 손으로 직접 무대를 세워 올리는 '창작자'로서의 비용을 지불하는 과정이었다. 나의 커리어 궤적이 이제는 남의 무대를 감상하던 때를 지나 나만의 맥락을 바깥으로 꺼내어 입체적으로 번역해 내는 창작자의 주기에 도달했음을 알리는 묵직한 신호이기도 했다.






3. 공간(空間)이라는 변수(Factor)가 달라지면서 요동치기 시작한 것들


우리는 종종 관객은 소비하는 사람, 수동적인 포지션으로, 창작자 혹은 디렉터는 만드는 사람, 주도적인 포지션으로 이분법 화하려는 함정에 쉽게 빠지는 것 같다. 하지만 이건 객관식과 서술형 주관식 문제를 풀어나가는 방법의 차이와 훨씬 닮아있다고 생각한다. 객관식의 가지치기를 통한 답안 쓰기와 서술형 주관식의 구체화를 통한 답안 쓰기는 삶의 내러티브를 구축하는 데 있어 각각 다르게 기능할 뿐, 흑백의 영역이나 맞고 틀림을 구분 짓는 잣대로 평가될 수 없다. 관객석에 앉든, 무대 위나 뒤에 앉든, 우리는 각자의 방식과 삶의 주기에 맞추어 각자의 세계를 넓혀가고 있을 뿐이다.


프롤로그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내 삶의 큰 변화는 언제나 3간(공간, 시간, 인간)의 이동과 함께였다. 자리를 사고, 다시 나만의 자리를 만들어가는 이 일련의 과정은 그 명제를 온몸으로 감각하는 시간이었다.


단지 하루 중 일하는 물리적인 '공간'이라는 변수 하나를 바꾸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한 번의 자리값 이동은 나의 일하는 배경 이상의 것들을 연쇄적으로 바꾸어놓았다. 공간이라는 변수가 이동하자, 곧바로 내 삶에 흐르는 '시간'의 속도와 내 곁에 함께 하는 '사람'들이 연이어 요동치기 시작했다. 새로운 공간은 나에게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단위의 시간을 요구했고, 내가 전혀 써본 적 없는 언어를 가진 사람들과 삶을 나눠본 적 없는 공통분모를 가진 사람들의 곁으로 데려다 놓았다.


공간이라는 첫 번째 변수의 이동이 불러온 이 연쇄적인 요동 속에서, 나는 여전히 매일이 다르게 느껴지는 이 낯선 무대 위에 나만의 것들을 올려두고 이리저리 맞추며 조율해 보는 중이다. 객관식의 세계를 떠나 주관식의 세계에서 새롭게 치러야 할 값과, 그 대가로 내 안에 남게 될 나만의 맥락들. 이 텅 빈 여백 위로 새롭게 겹쳐질 시간과 사람의 풍경이 내 삶의 내러티브를 또 어디로 뻗어나가게 할지, 기꺼운 마음으로 그 다음을 기다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