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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이라는 그루브

by 박재우

멋진 밴드의 라이브 공연을 보고 있으면 사람들의 시선은 종종 화려한 기타리스트나 열정적인 보컬에게 쏠리곤 하더구나. 하지만 진짜 음악을 아는 사람들은 무대 가장 뒤편에서 묵묵히 연주하는 드러머를 주목하지. 그들은 알고 있어. 드러머의 꾸준한 리듬 없이는 아무리 멋진 멜로디나 화려한 솔로라도 제대로 설 수 없다는 걸 말이야. 드러머는 밴드의 심장이자 그 심장의 박동을 만들어내는 사람이지.


나는 약속이 바로 그 드러머의 리듬과 같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맺는 모든 관계를 하나의 밴드라고 한다면 약속은 그 밴드의 모든 멤버들이 함께 발을 맞출 수 있도록 기준이 되어주는 가장 기본적인 박자 같은 거야. 그 박자가 흔들리지 않을 때 함께 연주하는 사람들도 그 리듬을 믿고 발맞춰 나아갈 수 있단다. 약속을 지킨다는 건 서로를 향한 믿음을 만드는 일이기도 하고 그 믿음 위에서 관계는 더욱 단단히 자리를 잡는 법이지.


얼마 전 네가 친구들과 합주 약속 때문에 속상했었다고 했지. 합주 시간에 자꾸 늦는 친구들 때문에 힘들다고. 그래서 결국 너도 “어차피 늦을 텐데”라며 약속을 가볍게 여기게 되었다고 말이야. 그리고 한 번은 네가 이렇게 말한 적도 있었지. “엄마에게 잔소리를 들을 게 싫어서 지키지도 못할 약속부터 대충 내뱉었다”고. 솔직히 말해줘서 고맙다. 사실 누구나 그럴 때가 있단다. 나도 어릴 적 그런 실수를 한 적이 있었고, 그로 인해 소중한 관계들에 금이 간 경험도 있기에 네 마음이 어떤지 충분히 이해해.


그런데 지키지 못할 약속을 가볍게 내뱉는 건 마치 어려운 리듬을 피하고 즉흥적인 ‘필인(Fill-in, 곡의 공백을 채우는 즉흥 연주)’만 남발하는 드러머처럼 보일 수 있어. 당장에는 그럴싸하게 넘어갈 수 있을지 몰라도 밴드 멤버들은 결국 그 드러머의 박자를 믿을 수 없게 되지. 드러머의 리듬은 밴드 전체가 발맞추는 기준이 되는데 그 기준이 흔들릴 때 밴드는 더 이상 하나로 연주할 수 없기 때문이야. 믿음은 한 번 깨지면 회복하기 어려운 법이야.


대중들의 눈길을 끄는 드러머는 주로 엄청난 속도의 드럼 연주를 하거나 보는 이를 매료시키는 화려한 기술을 선보이는 연주자일 거야. 하지만 연주자들이 칭송하는 위대한 드러머는 그런 화려함에 의존하지 않아. 롤링 스톤스의 찰리 와츠가 그랬지. 그는 화려한 필인이나 파워풀한 연주 대신 스네어 비트에서 하이햇을 빼는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로 밴드 특유의 중독성 있는 그루브를 만들어냈단다. 그가 들려준 꾸준하고 믿음직한 리듬은 다른 멤버들이 무대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폭주할 때도 음악의 중심을 잡아주는 단단한 지지대 역할을 했지. 그 덕분에 롤링 스톤스는 큰 위기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았고 결국 ‘살아있는 전설’이라는 명성을 얻었어. 이런 드러머야말로 관계 속에서 우리가 닮고 싶은 모습이지 않을까?


네가 말했던 친구들과의 합주도 마찬가지야. 멤버들이 박자를 놓쳤다고 해서 드러머마저 제멋대로 스틱을 휘두르면 그건 더 이상 합주가 아니야. 그저 불협화음만 만들어낼 뿐이다. 진짜 리더는 모두가 흔들릴 때 스스로 중심을 잡고 다시 하나의 박자를 만들어나가는 사람이란다. “다들 늦으니 나도 괜찮아”라는 생각은 네가 더 큰 역할을 할 기회를 놓치게 만들 뿐이야.


너는 너의 모든 관계라는 밴드의 드러머다. 그러니 지킬 수 없는 약속은 섣불리 내뱉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건 밴드 멤버들이 도저히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너무 빠른 박자를 외치는 것과 같아. 그리고 일단 약속이라는 카운트를 시작했다면 찰리 와츠처럼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정직한 박자를 지켜내야 해. 화려한 기술보다 중요한 것은 ‘너의 리듬은 언제나 믿을 수 있다’는 안정감을 주는 것이니까. 너의 그 단단하고 믿음직한 리듬 위에서 너와 너의 소중한 사람들이 세상 가장 멋진 하모니를 만들어갈 수 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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