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점 더 멀어져 간다
몇 년 전 키우던 강아지 Y를 먼저 보냈다. 14살에 떠난 Y는 7살 때부터 눈이 보이지 않았다. 눈이 보이지 않았던 때쯤부터 슬개골 탈구가 와서 걸을 때 뒷다리의 폼도 어딘가 삐그덕거리는 것 같았다. 그래도 Y는 용감히 걸었다. 벽에 머리를 콩콩 (때로는 쿵쿵) 부딪치면서도, 힘이 빠지는지 뒷다리가 주륵 미끄러져도 Y는 집안을 종횡무진했다. 그 모습이 얼마나 고맙던지.
하지만 10살이 넘어가니 Y가 예전 같지 않다는 게 실감됐다. 여전히 귀엽고 예뻤지만 걸음이 느려지고 방향 감각도 저하되어 집안에서 길을 잃기도 했다. 방구석에 머리를 박고 헤매고 있는 Y를 안아서 달래주는 날이 많아졌고, 밥을 먹을 때도 한 번에 사료를 주면 목에 자꾸 걸려 숨을 잘 쉬지 못해 곁에서 계속 몇 알씩 밥통에 흘려주어야 했다. 나이가 들면 주변 사람들의 손과 시간을 자주 빌리게 된다는 걸 늙어가는 Y를 보며 알게 되었다.
그날도 Y를 품에 안고 뭔가를 하고 있었던 것 같다. 동생과 함께 바닥에 앉아 Y를 보고 있었는데 소파에 앉아계시던 할머니가 우리를 내려보며 말하셨다.
"할머니가 어리고 예쁜 개 사줄 테니까 늙은 개는 버리자."
갑작스러운 말에 당황하여 잠깐 눈만 껌뻑였다. 정말 생각지도 못한 논리라 화가 나지도 않고 그저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우리는 Y가 어리고 예쁘기 키우는 것이 아니었다. Y는 10년을 넘게 우리 가족과 함께 해온 'Y'였기에 함께 사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그 말이 놀라웠던 건 '늙은 인간'인 할머니가 그런 논리로 Y를 버리자고 말한 것이었다. 늙었다는 이유로 버림을 말한다면 이미 당시에도 80대 후반과 90대였던 할머니와 할아버지도 버려질 수 있는 조건에 충족된다. 할머니가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건 당신이 스스로 생각하는 자신의 모습과 본인의 노화 상태에 큰 괴리가 있거나 당신이 늙어도 버려지지 않을 확신이 있기 때문이겠지만, 노화를 경험하고 있는 장본인이, 옆에서 보아도 신체기능이 떨어지면 주변사람의 도움이 점점 더 많아지는 사람이 늙음을 근거로 생명을 버리자고 하는 말이 나에게는 꽤나 큰 충격이었다.
조부모님과 함께 살면 좋든 싫든 나이 든 인간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목격하는 일들이 많아진다. 말이 잘 들리지 않아 몇 번이나 되묻고 소리를 지르듯 대답해야 간신히 알아듣는 두 분이 종종 이해하지 못해도 이해하는 척 고개를 끄덕이고 넘어간다는 걸 안다. 내가 다쳤을 때 팅팅 부어올랐던 발이 할아버지에게는 일상의 발이다. 당신들의 생일에 모인 가족들 사이에서 오가는 대화를 따라잡지 못해 생일 주인공임에도 두 분만 조용히 앉아 소외되는 모습을 매번 보게 된다. 조금만 움직여도 힘들어지는 신체기능의 저하 때문에 하루 종일 티브이 앞에 앉아 있는 뒷모습이 정말 작고 연약해 보여 가만히 바라본 적도 있다.
하지만 말을 알아듣지 못해 몇 번 말을 반복할 때면 짜증이 나고 지난밤 발이 아파서 자지를 못했다는 말씀이 반복되면 싫증이 나는 것도 사실이다. 외로워 보이지만 굳이 길게 얘기하고 싶지 않아 말을 걸지 않게 된다. 주름이 자글자글한 할머니의 얼굴이 순간 무섭게 느끼질 때도 있었다. 나이 든 사람들을 겪게 되는 서러움을 일상에서 지켜보며 안쓰러워하다가도 나의 일로 엮기게 되면 자연스럽게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는 나를 직시하면 나이 드는 것이 더욱 무서워진다. 이 모든 것이 후배 인간으로서 피할 수 없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단순히 얼굴에 주름이 많아지고 젊음의 생기가 사라지는 것 이상의 상실. 내가 할 수 있었던 것을 하지 못하게 되며 느끼는 박탈감. 타인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지만 그 도움을 지속적으로 줘야 하는 주변 사람들이 부담을 느낄 것을 이미 알고 있기에 눈치를 봐야 하는 무력함. 그 모든 것을 언젠가 나도 겪게 될 것이다. 그래서 할머니, 할아버지가 겪게 되는 서러움을 일상에서 지켜보다 보면 결국 슬프고 두려워진다.
생산성의 관점에서 본다면, 특히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성이 떨어지는 노인들은 사회의 입장에서 지출에 속한다. 즉 노인들은 사회적으로 '쓸모'가 떨어진다. 더 솔직히 말한다면 가정에서도 마찬가지다. 모든 생명은 생명 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에너지원이 필요하다. 모든 인간이 그렇듯 노인도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다양한 지출이 필요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수입은 적어질 확률이 크다. 결국 그를 부양해하는 밑 세대의 부담이 늘어나는 건 사실이다. 물론 내가 손이 많이 가는 늙은 Y를 버릴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던 것처럼 사회는 생산성을 이유로 노인을 고립시키는 걸 생각해서는 안된다. 생명은 생산성을 기준으로, '쓸모'를 기준으로 판단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상과 현실은 다르다. 꼭 노인뿐만이 아니더라도 이미 자본주의가 심화되고 있는 우리 사회는 생산성과 자본의 획득을 위한 경쟁이 치열하고 거기서 우위를 차지하지 못한 사람들은 점점 소외되기 쉬워지는 구조로 변화하고 있다. 이런 사회의 변화는 가정과 개인에게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여전히 가정의 영역은 효와 도리라는 개념이 불가침의 영역이므로 돈이 가족 간의 관계를 정립을 하는데 비교적 영향이 적지만(정말..?), 점점 노부모를 모시는 부담이 커진다면 노부모 봉양의 문제가 사적인 영역에서 벗어나 공적인 사회 문제이 되는 건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보인다.
그나마 나의 조부모님은 당신들에게 돈이 있고 가족들이 있기에 비교적 편안한 노후를 보내고 있지만 결혼을 하지 않을 수도 있는 나에게는 노화와 노후가 좀 더 심각한 문제로 다가온다. 나는 이미 사람이 나이가 들었을 때 물리적으로, 사회적으로, 정서적으로 얼마나 쪼그라들 수 있는지 알고 있고 결혼을 하지 않는다면 나를 보호해 줄 사적인 보호망이 없기 때문에 그 타격이 더욱 크다는 것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대학생부터 내 집마련과 노후대비에 관심이 많았는데 내가 일찍부터 경제력과 노후안정의 필요성을 느꼈던 건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살며 노후의 실제 모습을 직접적으로 봤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노년의 삶에 겪을 어려움을 미리 엿볼수록 우리 사회에 남녀의 결혼을 통해 만들어지는 가족 외에도 다양한 형태의 가족이 필요하다는 것도 점점 크게 느낀다. 생산성과 쓸모가 아닌 생명을 생명 그 자체로, 인간을 인간 그 자체로 소중하게 여기는 건 서로 공유한 시간과 함께 지나온 세월이다. 결혼이라는 제도는 자연히 그 제도로 구성된 구성원들이 서로 시간과 공간을 공유할 수 있게끔 뒷받침해주면서 이해관계과 생산성의 논리를 넘어설 수 있는 단단한 관계를 만들어준다. 반대로 생각하면 결혼을 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은 그런 안정적 관계에 대한 뒷받침을 공적으로 받을 수 없다. 결혼 제도 밖에 놓인 관계의 사람들은 제도적 뒷받침을 받지 못하기에 노후가 좀 더 고단해질 확률이 높아진다. 즉, 현재로서는 결혼을 선택하는 게 노후 대비에 더 유리하게 사회 구조가 만들어져 있다. 결국 우리 사회는 개인의 다양한 삶을 존중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내가 결혼을 하든, 하지 않든 안전하고 편안한 노후를 보내고 싶다. 앞에서 말한 상실감과 박탈감은 피할 수 없겠지만 내가 할머니, 할아버지를 보고 안쓰러움을 느끼는 것처럼 적어도 그것들을 이해해 주려고 노력해 주는 사람들과 함께 노후를 보내고 싶다. 이런 나의 희망은 지금의 사회에서는 허황된 욕심처럼 보인다. 하지만 안전한 노후의 삶은 결혼하지 않아도 인간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꿈꿀 수 있는 소망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