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세상에 나가고 싶어
우리집의 구조와 나의 고충을 아는 사람들은 백이면 백 독립을 권한다. 나도 그들의 답이 정답이라는 걸 안다. 누구보다 독립의 필요성을 아는 사람도, 독립을 원하는 사람도 나이다. 공유가 당연한 여섯 식구의 집안에서 나에게 허락된 나의 공간은 내 방이지만 그나마도 완전한 자유는 아니다. 닫혀있는 방문이 무색할 정도로 쉽게 넘어오는 소리들은 피하고 싶은 우리집의 모든 것들을 여과 없이 그대로 나에게 전달한다. 11시가 넘도록 옥상에서 내려오지 않으시는 할아버지와 그런 할아버지를 기다리며 불평하시는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리면 식탁 위에 반찬을 차려놓고 기다리는 엄마의 모습이 방안에서도 눈앞에 그려진다. 아침을 드시고 "일은 다 같이 해야 한다"며 큰댁에서 가져온 밤을 까기 위해 큰소리로 엄마와 아빠를 부르고 또다시 거실에 신문을 까는 할머니의 목소리를 들으면 일요일 오전부터 축 처지게 된다. 한동안 방밖으로는 못 나가겠군.
독립의 필요성을 가장 강렬하게 느낀 건 내가 때때로 할머니, 할아버지를 나의 조부모님으로 보는 게 아니라 엄마의 시부모님으로 볼 때였다. 나를 엄마와 동일시한다는 건 나의 정신건강에 굉장히 위험하다는 걸 알았기에 지금 내가 속한 환경에서 물리적으로 멀어지는 것이 필요했다. 나이도 충분히 독립할 나이가 되었고 벌이는 적지만 나름 안정적으로 직장도 다니고 있다. 사실 마음만 먹으면 나를 시시때때로 우울에 침잠하게 하는 집에서 도망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3세대가 섞인 집안에서 북적북적하게 살고 있다. 이 글을 쓰면서 이렇게 집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면서, 아주 오래전부터 '자기만의 방'을 그토록 갈망해 왔으면서 왜 나는 여전히 가끔씩 수렁에 빠진 듯한 기분을 들게 하는 곳에서 나오지 못할까 진지하게 고민하게 됐다. 고민의 결과를 크게 3가지로 나누어보겠다.
1. 내 집 마련을 위한 전략
앞에서 말했듯 지금 당장 집을 나갈 수는 있지만 집을 나와 갈 수 있는 곳은 한정적이다. 전세가가 억이 기본인 서울에서 현실적으로 내가 지금 가용할 수 있는 자금을 고려하면 '당장'이라는 조건을 만족하기 위해서는 월세밖에 답이 없다. 전세도 대출을 받으면 가능은 할 수 있겠으나 나는 월세도, 대출금도 지출항목에 넣지 않으려고 한다. 내가 생각하는 '자기만의 방'은 온전히 내 소유의 공간이기 때문에 나는 독립을 내 집마련으로 하고 싶다. 하지만 자가소유라는 거대한 꿈에 비해 나의 월급은 너무나 소박하다. 결국 최대한 줄일 수 있는 지출을 줄여서 최소한의 목돈이라도 만드는 게 관건이므로 서울에 몸 누우실 수 있는 곳이 있는 환경을 최대한 활용해 주거비를 줄인다는 나름의 전략으로 인해 여전히 나는 조부모님과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는 것이다.
본가에서 살며 주거비를 아끼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환경인 사람들이 굉장히 많은 것을 생각했을 때 나는 복에 겨운 상황일 수 있다. 또한 세상 모든 것에는 비용이 있고, 내 집마련이라는 목표를 위한 전략의 비용이 집에서 느끼는 무력함과 자책감이라면 나는 정신적인 주거비로서 그것을 감수해야 하는 게 맞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결혼하지 않을 확률이 높은 여성인 내가 서울에서 집을 사기 위해서는 최대한 지출을 줄이는 것이 현실적인 전략이기에 새끼 캥거루가 되기를 선택하지 않기는 어렵다. 월급상승률보다 월등히 가파른 기울기로 높아지는 집값과 보통 결혼을 하면 수입이 두 배가 되는 신혼부부들의 자금력과 기혼자 위주의 제도 혜택들을 고려하면 나는 이미 내 집 마련의 경주에서 출발선이 한참 뒤에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나의 선택으로 독립을 미루고 있지만 동시에 우리집을 둘러싼 무형의 벽이 나를 막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2. 이상한 책임감
지금은 많이 벗어났지만 한 때 나는 엄마에게 이상한 책임감을 느꼈다. 엄마를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이었다. 주위를 잔뜩 경계하고 있는 나에게 자문했다.
무엇으로부터 엄마를 지켜야 하는데?
우리 가족.
내가 집을 나가고 나면 집에 남게 될 엄마가 걱정되었다. 엄마의 노동과 수고가 너무 당연해 인식조차 하지 못하는 집안에서 그나마 엄마의 입장에서 목소리를 내는 내가, 이 가족 구조에 균열을 내려고 저항하는 내가 없으면 엄마가 더욱 힘들어질까 봐 두려웠다. 그때의 나는 내가 엄마의 해결사나 안식처가 되어야 한다는 의무감이 가득했다.
지금 돌아보면 그건 나의 욕심일 뿐 불가능한 일이다. 오랜 세월 이어져온 한국의 가족 문화 내 권력관계가 얽혀있는 이 문제에서 내가 엄마를 단번에 구출한다는 건, 보이지 않는 거미줄처럼 단단하고 견고하게 형성되어 있는 가족 내 권력 구조 속 엄마의 문제를 내가 해결한다는 건 나의 능력과 권한 밖의 치기 어린 마음이었다.
이제는 내가 엄마를 돕기 위해서 먼저 선행되어야 한다는 건 나의 안정이라는 걸 안다. 내가 먼저 단단해져야 누군가를 지킬 수 있는 힘이 있는 것이니까. 집에 남겨질 엄마가 걱정되어 독립을 하지 않는 건 결국 괴로워지는 사람이 두 명이 되는 결과일 뿐이다. 나를 위해서도, 엄마를 위해서도 나에게는 독립이 필요하다.
3. 관성
내가 독립을 하지 않는 이유 중 가장 외면하고 싶지만 인정해야 하는 것, 버틸만하다는 것이다. 당장 정말 내가 견디기 힘들었다면 내 집 마련은 차치하고 일단 나갔을 것이다. 이주가 아닌 도피라 하더라도 못 견딜 정도였다면 월세 보증금 정도가 모이자마자 집을 나오는 게 맞다.
버틸만하다는 건 부러지지 않을 정도의 여유가 있다는 것이다. 내가 부러지지 않을 정도의 여유가 있을 수 있는 건 그 여유 공간을 엄마가 받쳐주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집에 있는 시간이 많지 않다. 평일에는 하루의 2/3 이상을 회사에 있고 주말에는 방에 누워있거나 가끔 외출을 한다. 내가 집에 있는 시간이 많지 않을 수 있는 건 엄마가 집에 오래 있기 때문이다. 주말에 하루는 집안일에 할애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주말 일정을 자유로이 잡을 수 있고, 대부분의 날에 반찬이 준비되어 있기에 퇴근 후 장을 보거나 음식을 만드는 피곤함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
어느 날 문득 화장실 수납장에 항상 꽂혀있는 수건들과 옷장에 채워진 양말들을 보며 나 역시도 엄마의 노동에 대한 수혜를 나도 의식 없이 누리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가끔 엄마가 '너도 똑같아'라며 화를 냈지만 나는 엄마의 가사노동을 인식하고 거기에 분노하는 내가 어떻게 다른 가족들과 똑같냐며 도리어 분개했었다. 하지만 엄마의 말이 맞았다. 일을 벌이고 귀찮은 일은 엄마에게 넘겨버리는 할머니처럼, 설거지만 열심히 하는 아빠처럼 나도 내가 하고 싶을 때 하고 싶은 것만 가끔씩 하면서 말만 번지르르하게 하고 구석진 곳의 잡다한 일들은 그대로 엄마에게 넘기고 있었다.
내가 그토록 비판하던 구조의 혜택을 내가 잔뜩 누리고 있다는 걸 인식하자 어쩔 수 없는 자괴감이 생활 곳곳에서 나를 덮쳤다. 다 큰 딸에게 밥을 제대로 못 챙겨준다며 미안해하는 엄마를 보며, 동시에 나도 모르게 반찬이 없을 때 은근히 기분이 안 좋아지는 나를 느끼며 정말 집을 나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같이 있기에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부모의 책임감과 자식의 의존은 물리적으로 떨어져야 가능했다. 나를 이 가정에서 분리시켜야 하는 이유가 더욱 분명해졌다. 눈에 보이지 않아야 마음이 쓰이지 않고, 누군가 대신해주지 않아야 내가 직접 움직이니까. 결국 그동안 내가 인식하지 못한 사이에 나를 이 집에 머물게 했던 이유가 떠나야 할 이유가 되었다.
여기까지가 나의 변명이다. 결국 고민의 결론은 '독립해야 한다!'이다. 하지만 내가 집을 나온다고 해서 내가 보고 느껴왔던 문제와 갈등이 사라지진 않는다. 문제가 존재하는 공간에서 나만 빠져나오는 것일 뿐 여전히 갈등은 존재한다. 그렇다면 그 공간에 있는 동안에는 그곳을 목격한 기록을 남기는 게 의미 있지 않을까. 비록 누군가에게는 팔자 좋은 불만일지라도 내게는 절실했던 이 고민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