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K손녀일기 15화

내 곁에 있기에

내게 남은 사랑을 드릴게요

by 일상세팅러


할머니, 할아버지에 대한 감정이 순도 100퍼센트의 사랑이라고 할 수 없다. 그렇다고 100퍼센트의 미움이라고 할 수도 없다. 온전히 사랑한다기에는 내가 받아들일 수 없는 그들의 생각과 그들의 존재만으로도 만들어지는 복잡한 환경이 있고, 내가 미워하는 그들의 부분들이 그들이 살아온 삶의 흔적이라는 걸 충분히 알기에 온전히 미워할 수도 없다. 그래서 난 할머니, 할아버지에 대한 감정을 정확히 한 단어로 설명하지 못한다. 하지만 노인의 삶을 비교적 가까운 곳에서 보다 보면 자연스럽게 일상 속 노인에 대한 관심과 이해가 생겨나기도 한다.


이제는 보편화가 된 키오스크를 보면 항상 할머니, 할아버지를 떠올린다. 핸드폰 문자도 보내기 어려워하시는 분들인데 이런 걸 하실 수 있을까. 어느 날 할머니가 동네에 있는 타코야끼집에서 타코야끼를 사 오셨다. 주문은 키오스크로만 할 수 있는 곳인데 어떻게 사 오셨나 싶었다. 역시나 처음에는 타코야끼를 만들고 있던 직원에게 바로 주문을 하며 돈을 내려고 했는데 계속 안된다고 해서 뒤에 있던 사람들에게 대신 주문을 해달라고 부탁하셨단다. 그 후로 할머니는 타코야끼를 다시 사 오지 않으셨다. 물론 타코야끼가 입맛에 맞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주문을 거절당하고 다른 사람에게 대신 주문을 부탁했던 경험이 유쾌하지 않았던 것도 분명하다. 가뜩이나 스스로 할 수 있는 것들이 사라져 의기소침해지는 시기에 간식 하나 혼자 사 먹을 수 없는 기분은 어떨까. 점점 내가 자유롭게 갈 수 있는 공간이 줄어드는 기분은 어떨까.


이런 생각은 내 근무태도에도 영향을 미쳤다. 현재 나는 노인들을 자주 만나게 되는 업무를 하고 있다. 만나는 분들 대부분이 나의 조부모님보다는 연령대가 어리지만(두 분의 나이가 90대 전 후인걸 생각하면 당연한 것 같기도...) 비교적 젊어 보이는 60대에도 디지털 문맹은 생각보다 많다. 생각지도 못했던 아주 사소한 것도 일일이 설명하고 답변해야 할 때가 있다. 컴퓨터로 따지자면 마우스 왼쪽 버튼을 누르는 걸 '클릭', 두 번 누르는 걸 '더블클릭'이라고 하고 "지금은 마우스 버튼을 몇 번 누르세요."라고 안내하는 정도다. 너무 당연하고 같은 말을 반복해서 설명을 하다 보면 솔직히 짜증이 나기도 한다. 하지만 이미 집에서 비슷한 경험을 자주 겪은 유경험자로서 나에게는 인지되지도 않는 자연스러운 과정이 노인들에게는 낯설고 조심스러운 배움일 수 있다는 걸, 그리고 그 배움에 시간이 걸린다는 걸, 그 시간은 내가 처음 업무를 배울 때 내 의지대로 능숙해질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의지대로 조절할 수 없다는 걸, 젊은 사람보다 익숙해지는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걸 이미 알고 있다. 그래서 짜증은 금방 가라앉는다. 오히려 앉은자리에서 핸드폰으로 몇 분이면 금방 할 수 있는 일들을 처리하기 위해 시간과 힘 들여 나에게까지 오시는 분들을 보면 괜히 안쓰러움을 느끼기도 한다.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살아온 이상 나는 노인들에게 친절해질 수밖에 없다. 그들의 삶을 옆에서 보아왔기 때문에.


얼마 전 개인적으로 참여하는 독서모임에서 내가 발제자가 되었다. 발제자는 주제 선택부터 주제에 관련된 책과 영화를 선정하여 발제문을 만들어야 한다. 어떠한 제한도 없는 상태에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토론의 주제가 될 수 있는 무궁무진함 속에서 나는 '노인'을 주제로 선택했다. 책과 영화는 최대한 노인의 시점에서 진행되는 내용을 찾았다. 제삼자의 입장에서, 젊은 층의 입장에서 노인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것보다 노인이 직접 주체가 되어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콘텐츠를 보고 싶었다. 모든 인간이 겪는 생의 주기 중에서 인생의 초반인 어린이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어린이라는 세계>라는 책이 베스트셀러가 될 만큼 적극적이지만, 인생의 후반부인 노인에 대한 베스트셀러는 보기 어려울 정도로 노인이라는 계층에게는 보다 무심한 사회에 대해 젊은 사람들과 이야기해보고 싶었다. 내 또래의 독서모임 사람들이 노인들의 세계를 생각해 보는 시간을 만들고 싶었다. 그들이 노인에 대해 생각해 보고 노인들을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을 만들고 싶었다.


이상한 일이다. 당장이라도 할머니, 할아버지에게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내가 그들의 입장을 대변하고 싶어 하다니. 결국 이런 모순 속에서 역설적으로 나에게 나의 조부모님들에게 애정이 있음을, 내가 그들을 애틋해함을 깨닫는다. 내가 독서모임의 주제를 굳이 노인으로 정한 건 다른 사람들에게 노인에 대한 인식을 재고시키기 위해서도 있지만 그보다 먼저 내가 할머니, 할아버지를 이해하고 싶기 때문이다. 우리가 절대 완전히 같은 접점에서 만날 수는 없다는 걸 알지만 동시에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그분들을 미워하고 싶지 않아서, 그분들을 좀 더 좋아하고 싶어서 계속 노력하는 나를 안다.

그래, 나는 나의 할머니, 할아버지를 사랑한다. 사랑은 시간 속에서 돋아난다. 내 인생의 2/3을 훨씬 넘게 곁에서 함께 시간을 보낸 사람들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결국 나는 닿지 못할 곳에 계시는 두 분에게서 시선을 돌릴 수 없을 것이다. 그곳에 발이 닿지는 못하더라도 눈은 계속 마주치기 위해 노력하며 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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