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너무 사랑해서 생긴 병
“내담자들이 너한테 인신공격을 해도, 절대 사적으로 받아들이지 마.”
직장 동료들의 조언에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으론 이렇게 생각했다.
‘내가 내 일만 잘하면, 그런 일 생기겠어?’
그러다, 멜리사를 만났다.
그녀는 따뜻하고 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집 근처 새로 생긴 베이커리 쿠키가 정말 맛있다며,
“동료들하고 같이 나눠 먹어” 하고
환하게 웃으며 내게 쿠키를 한 박스를 가져다줬다.
상담 참여율도 높았고, 상담 때도 늘 적극적이었다.
상담사 입장에서, 꽤 희망적인 케이스였다.
하지만 멜리사에겐 깊은 상처가 있었다.
몇 달 전, 남자친구가 스스로 생을 마감했고
그 충격으로 고향 캔자스를 떠나 LA로 왔다.
지금은 작은 병원 프론트에서 일하고 있지만,
여전히 그와 닮은 사람만 봐도 가슴이 조여 온다고 했다.
어느 날, 멜리사는 울먹이며 말했다.
“그 사람이 살아 있다면 미안하다고,
고맙다고 얘기하고 싶어.
근데 그럴 수가 없어서 가끔은
그 사람 따라 떠나고 싶단 생각이 들어.”
그녀는 얼굴을 두 손으로 가리고 엉엉 울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정말 유감이야. 얼마나 힘들지 상상조차 안 돼.”
그 순간, 그녀가 고개를 들더니
눈물 대신 차가운 분노로 나를 쏘아봤다.
“날 동정하지 마. 네 따위가 뭔데 날 동정해?
넌 최악의 상담사야. 두 번 다시 널 안 볼 거야.”
당황했지만, 차분히 사과했다.
“그런 기분을 들게 했다면 미안해.”
그녀의 진단명은 경계선 인격장애(Borderline Personality Disorder, BPD).
이 장애의 주요 특징은 심한 감정 기복, 자살 충동, 불안정한 대인관계, 유기 불안, 충동적 행동, 만성적인 공허감과 우울감 등이 있다.
상담자로서 나는 그녀의 말보다
그 뒤에 숨은 감정을 봐야 했다.
“지금 느끼는 감정을 말해 줄 수 있어?”
조심스럽게 물었다.
하지만 그녀는 되려 나를 몰아세웠다.
“그건 네가 알아서 캐치해야 되는 거 아냐?
너처럼 남의 감정 못 읽는 사람은 상담사 자격도 없어.
문제 있는 건 너야. 너처럼 오만하고 한심한 사람은 처음 봐.”
그녀는 문을 박차고 나갔다.
그제야 직장 동료들의 말이 떠올랐다.
괴로웠지만, 사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려 애썼다.
솔직히 ‘다신 안 왔으면’ 싶었다가,
곧 ‘계속 와서 치료를 받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바뀌었다.
놀랍게도, 그녀는 돌아왔다.
손에는 스타벅스 20달러짜리 기프트 카드가 들려 있었다.
“지난번에 감정 조절이 안 돼서 실수한 것 같아.
미안해. 사과의 의미로 이거 받아줘.”
고개를 숙인 그녀에게 말했다.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너 자신을 돌보려고 여기 나온 것만으로
네 스스로에게 고마워해야 할 일인걸.
선물은 괜찮아. 받은 걸로 할게.”
그녀는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그날부터 우리는 DBT(Dialectical Behavior Therapy, 변증법적 행동치료)를 시작했다.
DBT는 경계선 인격장애, 분노조절장애,
극심한 우울과 불안 등으로 감정과
행동 조절이 어려운 사람들을 위한 심리치료법이다.
핵심은 ‘수용(acceptance)’과 ‘변화(change)’의 균형이다.
지금 이 순간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더 나은 방향으로 행동을 바꾸는 연습을 한다.
DBT는 네 가지 주요 모듈로 구성된다:
마음 챙김 (Mindfulness): 지금 느끼는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
감정 조절 (Emotion Regulation): 감정을 인식하고 적절히 표현하며 다루기
고통 감내 (Distress Tolerance): 위기 상황 속에서도 감정에 휘둘리지 않기
대인관계 기술(Interpersonal Effectiveness): 건강하고 단호하게 관계 맺기
우리는 이 네 가지를 함께 배워갔다.
감정을 다루는 기술을 익히고,
생각과 반응 사이에 ‘멈춤’을 만드는 훈련을 반복했다.
하지만 회복은 일직선이 아니었다.
어느 날, 그녀는 말했다.
“데이팅앱에서 만난 남자랑 잤는데…
성병에 걸렸어. 더러운 새끼.
이 도시 자체가 싫어졌어.
다시는 여기 못 살 것 같아.”
며칠 뒤,
그녀에게 고향인 캔자스로 돌아갔다는 연락이 왔다.
몇 달 뒤, 그녀에게 문자가 왔다.
“여기서도 상담받고 있어.
근데 너랑 했던 상담이 진짜
도움이 됐단 걸 이제야 깨달았어. 고마워.”
“문자 줘서 고마워. 늘 건강하길 바랄게.”
짧게 답장을 보냈다.
또 몇 달 후 그녀에게 또 문자가 왔다.
“친구들이 다 날 싫어해.
너무 외롭고 슬퍼. 다시 여길 떠날까 봐.”
이번엔 답하지 않았다.
그녀의 감정에 매번 반응하는 게
그녀의 정서적 독립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경계 설정(boundary setting)'이다.
경계 설정은 자신과 타인 사이에
건강한 거리를 두는,
즉 '나의 공간'과 '타인의 공간'을
명확히 구분하는 심리적 과정이다.
상담자에게도,
내담자에게도 꼭 필요한 과정이다.
경계가 무너진 상담 관계는 결코 건강할 수 없다.
특히 경계선 인격장애를 지닌 사람들에겐 더더욱.
경계선 인격장애는
‘사람을 너무 사랑해서 생긴 병’이라고도 한다.
애정에 목마르고, 거절에 예민하며,
관계의 끝에 대한 두려움으로
이들은 매 순간 감정의 소용돌이에 빠진다.
안타깝지만 이들을 위한 완벽한 치료법은 없다.
DBT와 같은 심리치료로 관리를 할 뿐이다.
상담실에서 경험한 작은 변화들은
미세하지만 또렷한 희망을 가져다준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눈물을 머금고 상담실을 찾는 이들에게
가장 따뜻하면서도 단호한 손길을 건넨다.
부디 우리 모두 남이 아닌
나를 좀 더 사랑하는 법을 배워가길 바라며.
**이 책에 등장하는 모든 이름은 내담자의 사생활 보호를 위해 가명으로 표기했으며, 사례와 상황 역시 실제 상담 내용을 바탕으로 재구성하고 편집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