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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의 카피

묵묵한 응원 : 우리 모두는 사실 카피라이터라는 말

by 쪼의 세상

일년에 한 두번은 카피라이팅 강의를 할 기회가 가끔 생깁니다

매년 강의 자료를 업데이트하면서도 바꾸지 않는 몇 가지 장표가 있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바로 '우리가 쓰는 모든 글과 말은 사실 카피라이팅이다'라는 장표입니다.

광고 마케팅 커리어를 시작한지 얼마 안되었을 때부터,

아니 어쩌면 카피라이터가 되기 전 광고 동아리에서 광고를 공부할 때부터 강조했던 개념입니다.


보통, 카피라이터라고 하면 화려한 말을 쓰고

1초 만에 소비자의 눈과 귀를 사로 잡을 이른바 '후킹'할만한 메시지를 던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요즘 우리가 자주 접하는 숏폼 형태의 모든 영상은 3초 안에 결판이 납니다

유튜브, 틱톡, 릴스 할 것 것 없이 자극적인 말들이 3초 안에 우리의 엄지를 사로 잡기 위해

화려한 비주얼, 화려한 말로 우리를 유혹합니다.


숏폼 시대 이전 TVC의 시절, 그 전에는 인쇄의 시절에도

카피라이팅은 우리의 눈을 사로 잡기 위한 강력한 말들을 사용해왔습니다.

사실 제가 처음 카피라이팅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던

짐 에이친스의 <커팅 앳지 애드버타이징>에서 전설적인 카피라이팅으로 주목 받았던 광고들이

저의 나름의 나침표가 되어주기도 했습니다. 시간이 된다면 나중에
이 책에서 제가 배웠던 것들을 공유하는 글을 따로 다루고 싶습니다.


9788994464398.jpg 짐 에이치슨 저자(글) · 이근형 번역 <커팅 앳지 애드버타이징>


광고회사를 다니던 시절에는 반발심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화려한 말들로 사람들을 설득하는 카피에 대한 호감도가 높진 않았습니다.

원래도 관찰과 공감을 좋아하던 개인적인 성향 탓일까요?

저는 사람의 마음을 읽고 보듬어주며, 화려하진 않지만

우리가 자주 말하고 쓰는 보통의 말로 이야기하듯 쓰여진 카피라이팅에 더 마음이 끌렸습니다.

아이디어 회의를 할 때도, 카피라이터 선배님들은 물론, 가끔 아트디렉터 선배들께서 가져오는

날 것 그대로의 문장, 혹은 정말 방금 입에서 튀어나온듯한 문장을 보면서

훨씬 더 고개를 끄덕이게 되고 마음이 동했던 경험들이 여전히 생각이 날 정도로요.


브랜드마케팅을 경험하고, 숏폼 플랫폼에서 크리에이티브를 하는 사람이 된 이후로

카피라이팅에만 집중해 일을 하고 있지 않지만 여전히 말과 글은 저에게 큰 부분을 차지 합니다.

비단 일을 할 때뿐 아니라, 타인과 소통하는 창구 그 이상으로
말과 글은 언제나 저를 나타내고, 표현하고, 저의 마음을 다듬어서 표현하는

중요한 도구가 되어 왔기 때문이죠.

다면 요즘은 일이 일이다보니, 숏폼 크리에이티브를 보면서 빠르고, 자극적이고, 후킹하는 말들에

자연스럽게 손이 가는 제 모습을 반성하면서 전 제가 좋아했던 카피라이팅 책을 꺼내어 보곤 합니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이자, 제가 존경하는 카피라이터 선배님인 이시은님께서 쓰신 < 짜릿하고 따뜻하게>라는 책입니다. 이 책은 저자가 사랑했던 일본 광고 카피라이팅 모음집이자 그 광고 카피를 보면서 느꼈던 저자의 소회와 경험을 소개하는 에세이집입니다. 여러분도 시간이 된다면 한번쯤은 읽어보시는 걸 추천드리죠. 꼭 광고나 마케팅 필드에 계신 분들이 아니더라도, 우리가 글과 말로 마음을 전달하는 방법을 더 가다듬을 수 있는 계기가 되어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책에 등장했던 몇가지 광고 카피들을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여러분의 느낌으로 그대로 받아드릴 수 있게 별다른 설명 없이 주욱 나열하면 이렇습니다.


1.

20년째 동창회

인생의 정답은 여러 개가 있다고 생각한다


저마다의 길, 아름답게

시세이도


2.

아직, 아무 것도 끝나지 않았고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았다


졸업 축하해

리크루트로부터


3.

나의 고향은 할머니 안에 있다

I LOVE 히요코


4.

작은 네가 올해의 여름을 잊어버려도

엄마가 계속 기억해둘게


글리코 유업


5.

그 사람의 사진을 갖고 싶어서

친구들의 모든 사진을 찍고 있다


마음과 몸

인간의 전부


올림푸스


6.

'얘기하고 싶어서..'

이 이상의 용건은 없습니다


NTT


7.

말할 수 없는 경우가 많으니까

사람은 쓰는 거라고 생각한다


빠이롯트



아주 일부만 소개했기에 여러분은 어떻게 느껴졌을지 모르겠네요.

제가 꽤나 좋아하는 카피들로 뽑아보았으니 여러분들의 마음에 드는 카피가

하나 정도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위의 카피들을 읽으셨을 때 혹시 어떠셨나요?

위의 카피가 저의 마음에 울림이 있었던 이유는

화려하거나, 눈에 띄는 문장 스킬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물론, 일본어로 된 카피가 한국말로 번역되면서

문장의 리듬이나 세밀한 결은 바뀌었을 수도 있겠지만

제가 이 카피들을 좋아하는 이유는 우리가 말하듯이 이야기하고 있어서 입니다.

오히려 우리가 차마 알지 못했던 마음 저 구석의 진실을

평범한 말들로, 보통의 말로 끄집어 올렸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의 울림에 집중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죠.


이런 책을 읽을 때마다 저는 다시 한번

제 강연 장표의 빠짐 없이 등장하는 그 문구를 다시 되내어 봅니다.

'우리가 쓰는 모든 글과 말은 사실 카피라이팅이다'

강연할 때 여러분 앞에서 저 이야기를 자신 있게 할 정도로

나는 저 말을 잘 지키고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저 말을 지키고 있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부끄럽기도 합니다.

그래도, 자신감을 가져봐야겠죠?


저의 자신감이 조금 떨어졌을 무렵

얼마전에 번역가 황석히 님꼐서 쓰신 책을 우연히 읽게 되었습니다

최근 <번역 황석희>라는 책을 쓰셨는데,

평소에도 좋아하던 분의 책이라 고민 없이 구입했었습니다.

놀랍게도 그 분의 책에 나온 문구가 바로 눈에 띄었습니다


"우리 모두 사실 번역가다"


제가 평소에 강연 장표에 썼던 그 말고 맥을 함께하는 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분야는 전혀 다르지만, 저와 비슷하게 생각하시는 분이 자신의 길에서 묵묵히 일하고 계신단 생각이 들어

어딘가 응원받는 느낌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보통의 말과 글이 가진 힘을 여전히 믿어보려 합니다.

제가 가진 이 생각이 언젠가 제 일에도 잘 녹아드는 날을 고대해봅니다.

보통의 말과, 보통의 글이 가진 힘을 믿어보려 합니다.


우리가 쓰는 모든 말과 글은 카피라이팅이니까요

어쩌면, 우리 모두가 사실 카피라이터일지도 모르니까요


그러니까 여러분도 오늘 자신의 말과 글로

누군가에게 울림을 줄 카피를 쓰고 있는지도 모릅 일입니다.



-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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