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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고래를 만나기 위해 바다를 건넜어

by 규란

언젠가, 범고래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봤다. 지구 여기저기에서 사는 고래들은 사용하는 언어가 무리마다 달라서 그런 말의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 무려 ‘통역’ 고래까지 있다고 했다.

그때 상상했다. 저 먼 바닷속을 헤엄치고 있을 고래들을. 다른 무리의 고래와 대화하고 싶어 외국어를 배우고, 통역사를 고용하는 고래의 세상을. 평생 알지 못할 그 세계를 나는 조금이나마 들여다보고 싶었다.


고래에 대한 무한 경외에 빠져 있던 나는, 신혼여행지마저 ‘고래’라는 두 글자 때문에 결정했다. 결혼에 대한 로망은 없었지만, 신혼여행‘지’에 대한 기대는 있었다. 살면서 여행에 가장 큰돈을 쓸 수 있는 기회가 아니던가. 결혼은 안 해도 신혼여행은 가고 싶다는 말을 곧잘 했던 건, 그런 이유였다.


내가 가고 싶던 곳은, 모로코의 사하라사막이었다. 별이 쏟아지는 사막의 밤. 그 하늘 아래 이제 막 부부가 된 연인이 함께 누워 미래를 그리는 모습. 이 얼마나 손발 오그라들게 낭만적이란 말인가. 나는 이 상상에 진심이었다. 내 미래의 남편이 겪어보지 않은 것에 대한 두려움이 클 거라는 건, 미처 예상하지 못한 변수였다. 결혼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가 나올 무렵, 메르스 바이러스에 전염된 사람이 국내에 보고되었다. 그 숙주는 사막에서 사는 단봉낙타라고 했다. 마음을 바꿔야 했고, 이번에 난 탄자니아의 세렝게티 국립공원을 제안했다. 하지만 내 남편이 될 사람은 나와 생각이 아주 달랐다. 모로코라는 미지의 세계에 발을 디디는 것에서 간신히 벗어났다 했더니, 이번엔 탄자니아라니. 그가 나를 조금 더 ‘안전’한 곳으로 이끌기 위해 꺼낸 카드는 ‘고래’였다.

“노르웨이로 가면 고래도 볼 수 있을 거야. 잘하면 오로라 아래를 헤엄치는 고래를 볼 수 있을지도 몰라.”


물가가 비싸기로 유명한 북유럽. 거기다 고래. 이건 신혼여행‘지’에 대한 나의 로망과 정확히 부합했다. 그 시기에 고래를 볼 수 있는지, 그런 정보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다. ‘고래’와 ‘오로라’라는 두 단어에 눈이 먼 나는 다가올 미래를 아무것도 보지 않았다. 결론적으로 6월 말에 떠난 신혼여행에서 당연하게도 고래도, 오로라도 보지 못했다.

그때서야, 고래를 만나는 데에는 시기, 장소, 하늘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걸 깨달은 나는 전 세계에서 고래가 출몰하는 시기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가장 가까운 곳은 오키나와였다. 12월 말부터 4월이면 혹등고래가 오키나와의 바다에서 헤엄을 친다고 했다.


오키나와의 고래 관광선은 사람이 50명가량 탈 수 있는 꽤 큰 배였다. 주로 볼 수 있는 건 꼬리 정도였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저 푸른 바다 어딘가에 거대한 바다 생명이 살고 있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온몸의 털이 쭈뼛 서는 체험. 고래와의 첫 만남은, 내가 고래를 더 꿈꾸게 하기 충분했다. 하지만, 더 이상 일본에서 고래를 보고 싶지 않았다. 일본은 상업 포경을 재개했고, 그곳에서 보는 고래는 더 이상 푸른 바다에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눈을 조금 더 먼 곳으로 돌렸다. 그 후, 다시 고래를 만난 곳은 하와이의 마우이섬이었다. 사람이 열다섯 명가량 탈 수 있는 고무보트에 올라탔다. 작은 배이기 때문에, 고래에게 엄청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 단, 구명조끼 같은 건 없었다. 그냥 바다로 나가서 고래에게 가는 거다. 혹등고래의 머리도, 그들이 내뿜는 물줄기도, 바다를 내리치는 꼬리도 모두 눈앞에 있었다. 너무 어마어마한 광경이라 소리를 지르지도 못했다. 고래에 대한 경외감은 이 세상에서 내가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를 실감하게 했다.


캐나다에 오기로 한 후, 가장 설렜던 것도 바로 이 ‘고래’였다. 넓은 국토 덕분에 세상에서 가장 많은 종의 고래를 볼 수 있는 나라. 몬트리올에서 차로 다섯 시간이면 도착하는 타두삭은 그야말로 고래의 도시라고 했다. 코로나가 우리의 발목을 잡을 거란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지만, 캐나다로 가는 비행기에서 내내 타두삭을 꿈꿨던 것 같다.

밴쿠버로 터전을 옮기기로 했을 때 역시, 고래는 위안이었다. 밴쿠버 인근에서는 7월~9월에 혹등고래, 범고래, 쇠고래를 볼 수 있었다. 2차 백신을 맞고 2주가 지난 무렵, 고래 관광선에 올라탔다. 밴쿠버 바다에서 만난 혹등고래와 범고래는 여전히 아름답게 거대했고, 인간의 존재를 아주 조그맣게 만들었다.


내가 사랑하는 이 고래들은, 현재 빠르게 그 개체가 줄고 있다. 포경 때문이기도, 환경이 오염되고 있는 까닭이기도 하고, 고래에 대해 환상을 갖는 나 같은 인간들이 만들어낸 관광선의 저주파 소음이 원인이기도 하다.

고래를 사랑한다고는 했지만, 고래 관광선을 타는 것엔 별 죄책감을 갖지 않았다. 동물원에 가는 것과는 달리 자연 그대로의 고래를 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이 있어야 할 곳은 사람 손이 닿지 않는, 환경오염이 없는 날것의 바다였다. 그곳에서 비로소 그들은 자유롭게 헤엄치고 자신만의 세상을 만든다.

최근의 고래 관광에서 나는, 여러 척의 배가 고래가 자주 출몰하는 지역을 둘러싸고 무전을 주고받으며 그들을 기다리는 장면을 보았다. 뭔가 이상한 기분이었다. 그들을 방해하고 있는 느낌, 내 집에 누군가 함부로 들어와 나의 생활을 훔쳐보는 느낌. 그것은 썩 달갑지 않았다.


메르스도, 코로나도, 인간의 이기심이 자연을 훼손한 결과이다. 동물 사이를 오가던 바이러스가 더는 갈 곳이 없게 되자 인간에게 들어온 것이다. 고래는 아직 밝혀진 게 많지 않은 포유류이다. 호기심이라는 이유로, 고래에게 우리가 더 들어가는 순간 또 다른 재앙이 우리를 덮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나는 고래를 향한 이 애정을, 이 경외감을, 이 호기심을 멈출 수는 없다. 하지만 관광 외에도 분명 방법이 있을 것이다. 여전히 고래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찾아보고 책을 읽는 건 그 방법을 찾고자 하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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