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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새는 싫어하지만, 새 관찰은 즐거워

by 규란

나의 새 공포증 역사는 꽤 오래되었다. 반경 2미터 안에 새가 들어오는 순간, 눈앞이 캄캄해져서 자리에 주저앉을 지경이다. 분명 어렸을 때는 공원의 비둘기 떼를 향해 달려가곤 했던 것 같은데, 왜 이렇게 새를 무서워하게 된 걸까. 사실, 그 원인으로 짐작하는 사건'들'이 있긴 하다. 아직도 생생한 기억들이지만, 그것까지 이야기하면 길어지니 각설하고.

무섭다 보니, 자연스레 싫어졌다. 거리의 난봉꾼 같은 비둘기도 싫고, 갈매기도 싫다. 공작새도 싫고. 아, 그냥 새는 다 싫다. 누군가를 싫어할 때, 가장 좋은 방법은 외면하는 거다. 없는 셈으로 치면, 마음도 삶도 좀 편안해진다. 한국에선 그게 좀 가능했다. 나의 새 공포증을 너무 잘 아는 주변 사람들은 비둘기 레이더가 되어 비둘기 출몰이 감지되면 서둘러 쫓아줬으니까.


여기, 밴쿠버에서는 사정이 좀 다르다. 한국에서는 비둘기만 조심하면 됐는데, 여긴 온갖 새들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온다. 거리는 비둘기와 까마귀가, 공원은 오리와 캐나다기러기(캐나다구스)가 장악했다. 이곳의 비둘기는 한국 애들만큼 뚱뚱하지도, 느리지도 않아서 더 조심해야 한다. 까딱 그들의 능력을 무시했다간, 언제 내 앞으로 두둥 돌진할지 모르는 일이다. 여고괴담의 그 유명한 장면처럼 말이다. 몬트리올의 공원에서 갈매기 한 마리에게 기습 공격을 당한 적이 있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건 나는 긴장을 놓지 않는다. 하지만 요즘, 놀랍게도! 내게 트라우마를 안긴 몇 종류의 새를 제외한 다른 새들에게는 약간의 친근함이 생기고 있다. (무섭지 않다는 건 아니다.)


지금 사는 집의 테라스 바로 앞에는 큰 나무가 한 그루 있다. 얼마나 크냐면, 4층인 우리 집 천장을 한참 지나야 그 끝이다. 나뭇가지 역시 사방으로 길게 뻗어서, 밖에서는 우리 집이 잘 안 보인다. 덕분에, 나는 옷도 막 갈아입을 수 있고 막춤도 출 수 있다. 그리고 많은 새를 만나고 그들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새 관찰 입문자 코스에 반 강제적으로 신청한 셈이나, 유리창 덕에 진입장벽은 낮았다.


이사 온 다음 날 아침, 쿵쿵거리는 소리에 잠에서 깬 나는 어느 나라나 층간소음이 문제라고 생각하며 이곳에서 살 미래를 걱정했다. 그러다 문득, 우리 집이 제일 위층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고야 말았다. 쫄보 중 대왕 쫄보인 내 머릿속에 온갖 무서운 장면들이 떠오른 건 당연지사. 반쯤 잠이 덜 깬 채로 이 소리가 어디서 나는지 찾아내겠다며 집 안을 돌아다니며 온 벽에 귀를 기울이는 모습은, 그게 바로 공포영화였다……. 그러다 테라스로 한 발을 내디딘 순간, 만화영화에서나 봤던 딱따구리가 눈에 들어왔다. 잡았다, 층간소음을 유발한 범인.

그뿐이 아니다. 언젠가는 말똥가리 한 마리가 테라스 앞 나무에 앉아 그날의 식사를 즐기기도 했다. 창밖에서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캐나다기러기가 꿱꿱거려서, 오롯이 혼자인 새벽에도 종종 웃곤 한다. 봄이 되자 지빠귀(영어로는 아메리칸 로빈이라는 이름이라, 만날 때마다 “로빈, 안녕!”이라고 인사한다)가 종종거렸고, 산책길의 작은 관목 속에서는 벌새가 노래했으며 제비가 재잘거렸다. 공원에는 막 태어난 새끼 캐나다기러기와 새끼 오리들이 있었고 그들이 자라는 모습도 목격할 수 있었다.

살면서 이렇게 많은 새를 본 적도, 새소리를 들어본 적도 없어서, 나는 새 공포증 환자임을 종종 잊었고 그 아름다운 자연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됐다.


여기서 산 지 1년 만에, 나는 앞서 말한 새들 외에도 아메리카원앙, 왜가리, 도요새, 올빼미, 어치 등을 만났다. 수많은 새가 눈에 보이다 보니, 새 공포증 환자는 그들의 이름이 궁금해졌고 뭘 먹고 어떻게 사는지 알고 싶어졌다. 새 사진을 보는 것마저 힘들어하던 내가 조류도감을 샀고, 여러 권의 새 관련 책을 샀으며 인터넷으로도 새 정보를 찾아봤다. 무섭지만 용기를 내 조류 보호 지역에도 다녀왔다. (앞서 지나간 사람들이 먹이를 줬는지, 오리들이 쫓아와서 기겁하며 도망치고 말았지만…….)

일본의 조류학자 가와카미 가즈토는 “새를 즐기려면 ‘보고’, ‘기르는’ 방법 이외에 ‘생각하는’ 방법이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의 말처럼, 나는 새에 대해 궁금해하고 그들의 삶을 생각하며 어느새 새를 즐기고 있었다. 비록 여전히 새가 무섭지만, 개인적으로는 정말 놀라운 변화이고 이건 분명 눈앞에서 다양한 종류의 새들이 인사를 건네준 덕분이다.


한국에서 살던 도시는, 새가 머물기 좋지 않은 곳이다. 몸을 숨겨 새끼를 키울 곳도, 여유롭게 먹이를 먹을 곳도, 잠시 쉬어갈 곳도 없다. 그건 달리 말하면 나무가 없다는 뜻이기도 할 테다. 물론 조금만 발을 돌려 산속으로 갔다면, 한적한 곳을 찾았다면, 많은 새를 만날 수 있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바쁘다 바빠 현대사회'를 살고 있는 많은 사람에겐 쉽지 않은 일이니, 도시에서 들리지 않는 새 소리가 아쉬운 건 어쩔 수 없다. 한국의 도시에도 나무가 늘어난다면, 쉬어가는 새들이 생겨나고 그렇게 비둘기 말고도 좀 더 다양한 종의 새를 보고 그들의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100세 인생의 1/3 이상을 살았고, 그중 절반 이상을 엄청난 새 공포증에 시달린 나도 새를 보다 보니 마음이 가고 호기심이 가고 저들의 삶을 보호하고 싶은데, 어릴 때부터 이런 자연을 보고 자란다면 이 지구가 오염되고 훼손되는 것에 조금 더 예민한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환경에 조금 더 무해하고, 지키고 인간들이 많아지는 세상, 그걸 꿈꾸는 게 사대주의적 모습은 아니지 않은가.




*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83가지 새 이야기> 가와카미 가즈토 외 / 서수지 옮김 / 사람과나무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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