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구생활

긴 모험

by 피터피터


탐구생활 - 어릴 때 방학 때면 학교에서 이 학습교재를 받았던 것이 생각났다. 옅은 황색 계열에 꽤 큰 면적을 가졌던 책자인데 이것 때문에 처음 라디오 방송을 듣기 위해 동네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던 모습도 갑자기 떠올랐다. 집 앞에 작은 동산이 있는 우리 집에선 라디오 전파가 잘 잡히지 않았다. 그래서 같은 방송을 듣기 위해 동네에선 또래의 아이들이 전파가 잘 잡히는 집에 모여들곤 했다. 나무 마루 위에서 장난을 치다 방송이 시작되면 모두 조용해지고 한 녀석이라도 떠들어 소리가 섞일 때면 짜증을 내면서도 방송이 끝나면 서로가 탐구생활의 빈칸들을 어떻게 채웠는지 궁금해서 기웃거리고 나는 내가 쓴 내용을 보여주기 싫어서 얼른 책자를 덮고 그 자리를 빠져나오곤 했다.


그렇게 제일 급박한 오전 일과가 끝나면 나는 하루 종일 물놀이를 하거나 아이들과 자연 속에서 온갖 것들을 하면서 어울렸다. 그땐 마음에 어떤 그늘도 없었다. 그냥 모든 게 행복했고 재미있었다. 그런데 그런 기억이 있었다는 것도 모른 채 살게 된 이유가 뭘까? 글을 쓰면서 내 마음속에 정말 탐구해야 할 것들이 아주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 마음의 무거운 모든 감정들엔 저마다의 사정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난 내 속에서 울리는 소리조차 외면하고 무시하면서 살아왔다. 너무 밖에서 나는 소리에만 온 신경이 곤두서 있었던 것이다.


어떤 글을 쓰기 위해서도 일단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 내 속에서 꼬이고 꼬인 여러 감정선들을 풀어내어 그것들이 제대로 작동하도록 만들어 주어야 한다. 지금의 나는 세상을 제대로 감각하여 좋은 글을 쓰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일단 내 속에서 찌그러져 있는 여러 기억의 파편들을 계속 꺼내어 빛을 쬐고 바람을 쐬어줄 필요가 있다. 내가 부정적 감정들에 매몰되어 잘못 감각하고 있는 부분들은 깊게 다시 들여다보아야 한다. 나 자신의 내면을 정말 깊게 탐구하지 않은 채 세상의 이야기를 풀어본들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것은 아마 나의 이야기가 아니라 내가 어디서 들은 누군가의 의견과 생각을 깊게 내면화한 것뿐일 수도 있다.


초조한 마음은 그냥 흘려보내자. 탐구 생활 숙제를 마친 후 세상에서 제일 즐거운 물놀이를 하기 위해 신이 나 있던 그 시절의 나처럼 세상이 그 자체로 두근두근 해질 수 있게 나의 마음의 때를 벗겨 내고 여기저기 깨진 틈은 메우고 얼룩진 상처들은 따뜻하게 보듬어 주자. 내가 주변에 무심한 것 이상으로 내 자신에게도 너무 무심했다. 시골에서 부천으로 올라온 이후 집안 식구 누구도 편한 사람이 없었다. 그런 환경 속에서 아무도 힘들다는 소리를 밖으로 꺼내 이야기하지 못했고 눌린 감정들은 차곡차곡 쌓여서 이제는 그 무게가 삶의 모습들에 고스란히 반영되고 있다. 항상 식구들이 모여도 형제들이 각자 자기 일에 몰두하고 부모님과 부딪히지 않기 위해 안전거리를 유지하는 것에 맘이 좋지 않았는데 거기엔 역시 이유가 있었다.


그런데 한 번도 그 이유를 깊게 들여다 보고 탐구할 생각은 해보지 못했다. 그것은 너무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일이었기에 그런 긴 모험을 떠나기에는 나 자신이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내 속에는 내가 모르는 많은 것들이 뭉쳐서 거대한 덩어리를 이루고 있다. 이것저것 섞인 것이 하도 많아서 그게 무엇이라고 딱 잡아 정의 내릴 수도 없는 것들이 내속에서 그렇게 돌아다니고 있다. 그 무겁게 돌아다니고 부딪히는 마음에 내 속이 그렇게 답답했고 그 답답한 속을 풀기 위해서 나는 또 밖으로 나돌아 다니면서 온갖 바깥바람을 쏘이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나의 글은 한참이나 지난 후에 나올 것이다. 지금은 세상을 보고 내 내면을 보고 구도를 잡고 스케치를 할 수 있는 그런 기초를 쌓을 시간이다. 어릴 때 숙제로 탐구생활을 받아 들고 방학생활로 돌진하던 그 마음 그대로 이제는 내 속으로 차분히 모험을 떠나보자. 그리고 긴 모험을 끝내고 돌아와 거칠게 그려진 스케치 풍경을 바탕으로 나만의 제대로 된 글을 써보자. 그리고 그렇게 될때까지 이번에는 지치지 말자. 다시 한번 힘내자.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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