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렘
글 쓰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은 경험을 할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나 같은 경우 평소에는 긴 글을 쓰지 않는다. 짧은 글들을 간단하게 메모해 두고 인상에 남는 것에 대한 감상 정도를 남겨두지만 그것을 발전시켜서 하나의 큰 덩어리를 만드는 작업을 이전에는 해본 적이 없다. 그래서 이 상황이 무척이나 낯설다.
전체적인 윤곽이 보이고 그것에 따라 마구잡이로 떠오르는 핵심 키워드를 스케치하듯 적어둔 다음에는 계속 앉아서 글을 쓴다. 문제는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작업을 감에 의지해서 하다 보니 이 방향성이 만약 잘못되었다면 나의 글은 수렁에 빠져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이 될 것이라는 점이다. 보통이라면 어떤 시나리오를 기획하고 줄기를 만든 다음 그것에 맞는 세부 아이디어를 시간을 들여 다듬어야 하지만 내가 지금 쓰는 글은 그런 틀을 따라가서 쓸 수 있는 글이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내일 내가 일어나서 무엇을 쓸지 전혀 알 수가 없다. 그런데 다음날에는 또 앉으면 글이 써진다.
내가 지금 어떤 흐름 상태에 들어가 있다는 것이다. 전에 나는 이런 상태를 경험해 본 적은 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이런 상태에 돌입해서 거의 1년을 약간 붕 뜬 기분과 감정으로 공부에 몰입하고 나서 나는 완전히 번아웃되어버렸다. 지금도 매일 글을 완성하고 나서 휴식을 취하려고 하면 기분이 급격하게 다운되면서 나빠지는 걸 느낀다. 자신감이 사라지고 온갖 부정적인 감정들만 내적으로 쏟아져 들어온다. 이런 자신을 보고 있자면 어떤 것이든 창작의 영역에 있는 사람들이나 연예인들이 왜 그렇게 악플에 취약한 것인지 이해가 가는 측면이 있다. 창작은 단순히 기억하고 있는 정보를 조합하여 무언가를 짜 맞추는 것이라기보다는 정보를 완전히 분해하여 자기의 세계관 안에서 자신만의 논리로 무언가 기존에 없던 것을 만들어내는 작업이고 그것에는 분명 뇌를 말랑말랑하게 하는 호르몬이 관여하는 느낌이다.
그러고 나서 작업이 끝나고 휴식을 취하려고 하면 그 호르몬을 중화시키는 무엇이 분비되어 이렇게 기분이 엿 같은 상황이 벌어지는 그런 느낌이다. 이 기분에 만일 누군가 확 기름을 붓는 악평을 쏟아낸다면 나의 내부에서는 아마 굉장한 불꽃이 발화하여 폭발적인 자기 파괴적 충동에 혼자 미쳐 날뛸 것 같은 상상을 해본다. 이게 언제까지 이렇게 되는 것인지 모르겠다. 머릿속에 있는 전체적인 윤곽은 잠시만 멈춰도 모두 통으로 사라질 것이다. 단 일주일만 휴식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이것들은 세상에 없었던 것처럼 흩어져 다시 내 내면 깊은 곳에서 완전히 깊은 잠에 빠져들 것이다. 모든 것이 그냥 감이다. 확실한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너무 불안하다.
글을 쓰면서 나의 문체가 툭툭 튀는 걸 느낀다. 한 번도 단련하지 않은 육체를 가지고 마라톤을 뛰겠다고 덤비는 꼴이 아닌가! 나의 글은 한 번도 이런 정도의 압박을 받아본 적도 없고 어떤 일관성과 중심이 단단한 내공 또한 없다. 그냥 흐름 속에 있으면 업이 되어 자신감이 넘치게 되니까 계속 자판을 두드리는 것이지만 이렇게 글을 쓰는 게 맞는 것인지 모르겠다. 혼자만의 일기라면 물론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이것은 공개되는 글이고 나의 글이 누군가에게는 불편한 무엇일 수도 있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누군가를 상처 줄 수 있고 흥분된 상태에서 되지도 않는 망상과 이론을 펼치면서 내 글 속에 언급되는 누군가를 욕되게 할 수도 있다.
무엇보다 이것은 기억의 파편을 따라가는 작업이다. 기억은 기록이 아니다. 말 그대로 해석이다. 내속에 있는 이미지들에는 정확한 날짜가 찍혀있는 것이 아니다. 전체적인 이야기가 내 머릿속을 계속 흘러 다니면 나는 그것을 잡아서 문자화 하지만 이것이 사실인지는 크로스 체크가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멈추어서 서랍 속에 넣어두고 묵힐 수 없는 글이라는 것이 나를 초조하게 하는 것 같다. 생초보가 이런 식으로 글을 써도 되는 것일까? 정신없이 써여 지기에 글을 찍어내고 있지만 점점 자신이 없어진다. 나의 완벽주의가 또 내 마음속의 양심의 파편을 건드리기 시작하고 있다. 어린 시절 내가 누구가의 글을 질 낮다고 비판한 그대로 내 글에 독설이 쏟아지는 것이 느껴진다.
처음 가는 길은 설렌다. 그래 설렌다. 이것은 설렘일 것이다. 걱정 말고 그냥 가자. 오늘은 이만해야겠다 다시 시궁창 같은 기분으로 돌아가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