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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리티 Feb 15. 2024

그가 천재였다면

데이먼 셰젤의 <위플래쉬>

 1. 극한의 데시벨, 완벽주의자의 얼굴


귀마개를 나눠주는 공연이 있다. 팝음악전문지 <롤링스톤>은 '귀머거리의 고막을 울리는 소음'이라는 타이틀을 붙였다. 아일랜드 출신 밴드 MBV(My Bloody Valentine)의 라이브를 한국에서 세 번씩 보게 될 줄은 몰랐지만, 우리의 손에는 귀마개가 담긴 틴케이스가 하나씩 들려있었다.

일상에서는 들을 수 없는 증폭된 사운드를 즐기러 오는 락음악팬들에게 귀마개라니. 그 발상부터가 이상하지만 그렇게 이상하지 않았더라면 MBV를 좋아할 수 있었을까.

누군가는 그건 음악이 아니라고도 했다. 선명한 멜로디가 없고, 노랫말은 기타 소음에 묻혀서 들리지도 않는다. 소음을 견디자고 음악을 찾는 사람도 있을까. 하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그 소음이 자아내는 멜로디가 들렸다. 하루키가 말했던 '먼 북소리'처럼 노래가 끝나도 쉬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이 소음인지 음악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우리는 극한의 데시벨을 기대하며 무대를 바라보았다. 귀마개는 아직 주머니 안에 있었다. 그 곡이 연주되기 전까지는.


MBV의 사운드를 주도하는 케빈 쉴즈(Kevin Shields)는 완벽주의자로 유명하다.

'상업적으로 성공하지 못한 앨범가운데 가장 큰 노력이 들어간 대작, <Loveless, 1991>'.

이런 수사는 칭찬일까 그 반대일까. 케빈쉴즈가 속한 레이블은 그 앨범을 제작하느라 파산 직전까지 갔다.

MBV의 팬이라면 곧 케빈쉴즈의 팬이라는 뜻이 된다.(https://www.youtube.com/watch?v=VpoOjoiYcWY&list=PLMxy067kbpQgOX6yhP8tqVmItZxpOrAoY&index=6)

결국 말을 들었어야 했다. 문득 고막이 버텨줄까 겁이 났다. 공연 후반부에 가서야 귀마개를 착용했다. 그러고도 충분히 터질듯한 사운드였다. 15분이 넘는 그 곡에서 어린 드러머의 손이 보이지 않았다. 벌새의 날갯짓처럼 보이지 않는 손을 쫓느라 멍해질 무렵 케빈쉴즈의 얼굴을 보았다. 그 역시 기타를 몰아치고 있었지만 동시에 드러머를 지켜보고 있었다. 칼날 같은 눈빛.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 얼굴이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케빈쉴즈의 모습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한참 생각했다.


2. 나는 위대해질 거야, 그러니까 우리 헤어져


뉴욕의 음악 명문고등학교 셰이퍼에 입학한 드러머 앤드류는 친구가 없다. 학교생활을 걱정하는 가족들에게 근근이 90세까지 사느니, 욕먹더라도 40전에 뭔가를 이루는 삶을 말한다. 남들 기대하는 그림 같은 학창 시절이랄 건 없지만 지독한 음악선생 하나는 안다. 당근과 채찍, '병 주고 약 주고'의 달인인 플래쳐는 인신모독이라는 선을 넘는다. 자신의 템포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가차 없이 따귀를 날리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은 그는 온갖 험한 말로 가스라이팅하며 앤드류를 자극한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그 모욕을 당하고도 포기가 되지 않는다. 밴드의 드러머 퍼스트 자리를 향한 열망은 더욱 거세어진다. 여자친구에게 미리 결별을 선언하고, 피가 철철 흐르는 손을 얼음물에 식히며 드럼만 두들기게 된다. 심지어 트럭에 치이는 교통사고에도 비틀거리며 드럼스틱을 쥐고 무대에 오른다. 드럼 외에는 모든 것이 지워진 세상에 산다.

여자친구를 향한 그의 단순한 결별선언에 놀란다. 그 말을 선뜻 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나는 위대해질 거니까"

말하지 않아도 안다. 겸손 때문이 아니다. 허풍도 아니다. 그 말을 뱉을 수 없는 진짜 이유는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그 말을 감당하기 위해 죽도록 노력할 자신이 없다. 책임질 말을 하기 싫고, 죽도록 노력했는데 실패하는 것이 두렵다. 그래서 보통은 타협한다.

요즘에는 그렇게 말하는 것이 대세라는 것을 플래쳐도 안다. 즐기면서 살라거나 적당히 칭찬하면서 모두가 듣고 싶어하는 말로 인기를 얻을 수도 있다.

"그만하면 잘했어."  


3. 그가 천재였다면, 좌절하지 않았겠지


플래쳐는 욕도 많이 먹었고, 학교에서 해직당했다. 제자가 자살하기도 했지만, 자신의 신념을 사과할 뜻은 없다. 그는 다르게 말한다.

"그만하면 잘했다는 말보다 해로운 건 없어.(There are no two words in English more than harmful than good job.)

찰리파커에게 심벌즈를 던지지 않았더라면 그가 될 수 있었을까. 플래쳐는 늘 앤드류에게 강조한다.

때로 성장이나 진보는 PC 함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도덕적이고 친절하고 올바르고 반듯한 가르침으로 더 높은 단계에 이를 수 있다면 이상적이겠지만, 어느 시기에는 오기가 무엇보다 큰 동기부여가 된다. 한을 품어야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 부조리 속에서 세상이 돌아간다.

모짜르트도 베토벤도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들의 아버지는 아무 것도 모르던 어린 시절부터 가두다시피 해서 피아노를 시켰다. 요즘 같으면 학대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몇몇 피아노 전공생들은 부모의 극성으로 그 길까지 왔다는 종종 얘기를 하는데, 그들 역시 부모와 사이가 그리 좋지 않다는 것은 무엇을 말해주나.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부모 안에 플래쳐의 일면이 있는 것이다. 앤드류의 경우처럼 따뜻한 아버지였다면 플래쳐같은 선생이라도 만났을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피아니스트는 꿈이라도 꾸게 되었을까.    

아무리 그래도 학대에 가까운 플래쳐의 교육방식에 반감이 든다. 하지만, 사람의 본성을 어떻게 할 것인가.


앤드류도 반발한다. "그래도 선은 넘지 말아야죠"

나에게는 찰리파커 같은 제자가 없다고 말하는 플래쳐. 그는 여전히 흔들림 없다.

"그가 찰리파커였다면, 좌절하지 않았겠지."

이번에는 반박할 수 없다. 인생에 선을 넘는 모욕을 겪고 조롱당하고 바닥을 치는 순간이 없는 것이 우월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다. 바닥을 치는 그 순간의 다음 스텝이 그를 정의한다. 

"찰리파커는 웃음거리가 되어 그날 밤 잠을 이루지 못했겠지. 그런데 그다음 날 어떻게 했지?"

연습, 연습, 연습.

https://www.youtube.com/watch?v=LCSN7WwV534

 

4. 내가 큐를 줄게


몰라서 못하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알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데에 있다. 앤드류는 다시 플래쳐의 밴드에 들어간다. 또 당한다. 플래쳐가 주지 않은 악보를 맞추느라 진땀을 빼고 결국엔 망신. 연주자로서의 첫발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린다. 언제라도 아들의 편이 되어줄 아버지의 격려가 따뜻하지만, 그대로 머물 수만은 없다.

발길을 돌려서 무너진 자리로 돌아간다. 이번에는 플래쳐를 기다리지 않는다.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연주하기 시작한다. 다가오는 플래쳐에게 욕설을 날리고, 당황하는 밴드에게 직접 지시한다.

"내가 큐를 줄게"  


질주가 이어진다. 연습 또 연습으로 쌓아올린 세계가 제자리를 찾아간다. 플래쳐가 잠잠해진다. 한계를 넘기 위한 스승과 제자의 치열한 격전이지만 합의가 이루어지는 단 하나의 영역이 있다. 훌륭한 연주 앞에서 그 밖의 것들은 사소해진다. 눈빛이 마주친다. 피하지 않는다. 이전에 없던 두 사람만의 유일한 평화의 순간이다.


 


*<위플래시, 2015>는 넷플릭스, 왓챠, 웨이브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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