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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리티 Feb 12. 2024

이상한데 왜 뭉클하지

다니엘스 감독의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1.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유니버스는 


수많은 선택지들 사이 놓쳐버린 것들이 오늘도 발목을 잡는다. 아주 사소한 선택부터 인생을 바꾸는 결정까지. 

늘 마시던 아메리카노 말고 이 집 시그니처인 아인슈페너를 시켜야 했을까. 지난달 산 옷이 시즌오프로 할인가에 나왔다. 조금만 더 기다릴걸. 미니멀리즘 시대인데 옷은 또 괜히 샀나. 환경오염이라고 안 사는 게 유행인데. 아, 그래도 품절된 그 옷은 지난번에 샀어야 했다. 역시 조금 멀더라도 그 집 파스타를 먹으러 갔어야 했어. 여기는 별로야. 그때 나는 그 전공을 선택해야 했을까. 그 시절에 꼭 그를 만나야 했나.

놀랍게도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가장 흔한 고민이 평행우주론과 맞아떨어진다. 우리가 놓쳐버린 수많은 버전의 '나'가 있고 셀 수 없는 우주가 있다. 지금 내가 놓쳐버린 최상의 선택으로 뭉쳐진 가장 멋진 나의 유니버스가 어딘가에 존재한다. 


"나는 당신을 알아. 늘 뭔가 이룰 기회를 놓쳤을까 전전긍긍하지"

남편이 아내 에블린에게 말한다. 꼭 에블린이 아니어도 충분히 시달리고 있다. 

언제부턴가 'FOMO'라는 단어가 눈에 띈다. 'Fear Of Missing Out'의 줄임말이다. 만일 최고의 선택으로 이루어진 유니버스가 있다면 그곳에는 놓쳐버린 것들에 대한 두려움이 없을까. 최상의 선택으로 쌓아 올린 유니버스에서 나는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2. 당신과 결혼하지 않은 멋진 나


미국에서 세탁소를 운영하는 중국인 이민자 부부 에블린과 웨이몬드. 뭐 하나 허투루 보내는 것이 있을까 날을 바짝 세운 채 하루하루 살아가는 아내 에블린. 그녀의 굳은 표정에도 이유는 있다. 수북이 쌓인 영수증더미와 가압류 문서 말고도 에블린을 골치 아프게 하는 것들은 얼마든지 널렸다. 딸내미는 여자친구를 데려와 게이임을 선언하고, 남편은 늘 허허실실. 여기저기 인형눈알을 붙이며 즐거워하고 적들에게도 쿠키를 나누어준다. 도무지 야무진 구석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는 와중에도 이혼준비 중.  에블린이 그렇게까지 악착같이 살지 않았더라면 이 정도의 삶이나마 누릴 수 있었을까. 쳇바퀴 돌리듯 굴러가는 일상의 반복. 이웃들을 초대하는 파티를 앞두고 불만지수는 정점을 찍는다. 모든 것을 때려부수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그런 날이 있다.

지금 이 곳만 아니라면 행복할 것 같은 기분. 혹시 내가 잘못된 선택을 해서 이렇게 살아가는 건가.

 

멀티버스 내비게이터를 받은 에블린은 결국 우아한 드레스를 입고 카메라 플래시를 받으며 레드카펫을 밟는 멋진 내가 살고 있는 유니버스를 엿보고 말았다. 

그 선택을 밀고 갔더라면 지금처럼은 살지 않을텐데. 에블린은 남편에게 고백한다. 웃어야 할까 울어야 할까. 

"당신과 결혼하지 않는 나를 봤어. 아주 멋졌어."

웨이먼드는 차마 답하지 못하고 다른 이야기로 돌린다.  


3. 돌멩이의 시간


에블린의 딸 조이는 가족에 대한 별다른 기대도 없다. 자신의 동성친구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엄마와 더 이상 같이 지내기도 힘들어진다. 그는 점점 가족을 등지고 절망의 베이글로 향한다.


"모든 게 다 부질없다는 것. 기분 좋지 않아?

부질없는 거면 아무것도 이뤄내지 못한 죄책감이 사라지잖아."


부질없다는 말을 흔히 하지만, 그 안에 담겨있는 묘한 안도감을 지적한다. 한번 그렇게 탓해 버리면 모든 것들이 동등해져 버린다. 하지 않았던 선택도, 미뤄두었던 일들도 오히려 잘된 것으로 바뀌는 마법인 동시에 달콤한 유혹이다. 결국 인간은 사소한 우주의 먼지라는 과학적 사실이 그래서 모든 삶에 면죄부를 주는가.

얼굴만 맞대면 으르렁대던 모녀가 황야의 돌멩이가 된 유니버스에서 만난다. 

"그런 고민 하지 말고, 여기서는 그저 돌이 되면 돼"

그곳에서 에블린과 조이는 인류의 역사와 우주의 움직임의 일부가 된다.

https://www.youtube.com/watch?v=UXar2tNdG34

우리에겐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 믿던 역사가 있었다. 그것을 진리라고 믿으며 다른 주장을 하는 사람들을 죽이고 괴롭혀왔지만 그래도 세계는 움직인다.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었음이 밝혀지고, 그 태양마저도 우주의 아주 작은 일부에 불과하다. 앞으로도 새로운 발견이 계속될 것이고 그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뭔가를 발견할 때마다 반증하는 셈이지. Every New discovery is just a reminded

우리 모두 하찮고 어리석다는 걸  We're all small & stupid"

오랜 역사 속에서 인류는 진보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 있다. 우리 모두는 어리석다는 것. 스스로를 우월하고 현명하다고 여기지만, 그 패러다임이 깨질 때 역설적으로 진보가 이루어진다. 진보한다든 것은 인류가 어리석다는 것의 반증이다.

그래서 우리는 절망해야 할까. 아무리 발버둥쳐봐야 어리석고 하찮은 개개인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에?

기껏해야 우주의 먼지에 불과하다며, 인생이 부질없다고 말하며 스스로를 위로하고 죄책감에서 벗어나면 그만인 것일까.

지구를 '창백하고 푸른 점'으로 명명했던 칼세이건이 가졌던 우주에 대한 경이감이 어리석음에 대한 회피로 결론지어지는 것을 무기력하게 바라봐야하는 것일까.

텁텁한 모래바람이 씹힐 것 같은 즈음, 돌멩이에 땡그란 눈이 달리고 규칙이 깨어진다. 웨이몬드가 집안 여기저기 붙여두었던 장난감 눈알은 갇혀있던 그들에게 생명을 일깨워준다. 


 4. 최상의 유니버스에 없는 것들


우아한 에블린의 유니버스에서 그는 멋진 웨이몬드를 만난다. 배우로서 시상식의 화려한 갈채를 벗어나 멀끔한 수트 차림의 또 다른 알파 웨이먼드를 찾아가는 에블린. 

모든 것들이 완벽해 보이는 유니버스에서는 놓친 것들에 대한 아쉬움이 없을까?

알파 웨이몬드의 고백은 뜻밖이다. 

"다른 생에서는 당신과 세탁소를 하고 세금도 내면서 살고 싶어."

딴세상 이야기가 아니다. 얼마나 많은 스타들이 평범하고도 무명의 나날들을 그리워하는지 숱하게 들었다. 스타가 되기까지 놓쳐버린 학창시절, 가족들간의 일상에 눈물을 보이곤 한다.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언제나 무르게만 보이던 웨이먼드에게도 거친 세상을 살아가는 나름의 수단이 있었다.

"내가 늘 세상을 밝게만 보는 건 순진해서가 아니야. 나는 전략으로서 '긍정'을 선택한 거야"

모든 것들이 부질없고 실망스럽게 다가오는 날일수록 웨이먼드를 기억해야 한다.

"제발 다정해져요. 특히나 뭔가 혼란스러울 때"


조이는 뾰루퉁하게 엄마에게 묻는다.

"뭐든 될 수 있고 어디든 갈 수 있잖아. 왜 그런 곳으로 가지 않는 거야?

이곳은 그래봐야 상식이 통하는 것도 한 줌의 시간뿐인 곳이야 "

모두가 부러워하는 완벽한 배우의 삶보다 영악하지는 못해도 다정한 남편과 뒤죽박죽인 가족들이어도 나의 빈 곳을 채워줄 수 있는 현재의 삶. 

에블린의 선택은 더욱 견고해진다.


"그렇다면, 소중히 할 거야. 그 한 줌의 시간을"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앳 원스, Everyting evrywhere al at once 2022>는 왓챠와 웨이브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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