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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리티 Feb 05. 2024

이토록 우아하고 도도한 세계

캐롤 리드의 <제3의 사나이>

1. 흔들리는 날엔 이 영화가 필요해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속담을 좋아하지 않는다. 진취적이지 못하다느니 열정이 부족하느니 탓해도 어쩔 수 없다. 세상에 안 되는 일도 분명히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좋다. 사람 관계에서는 특히 더 그렇다. 아마도 영화를 본다는 것은 그런 현실에서 잠시 벗어나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들은 로맨스를 찾는다. 기대한다. 결국엔 헤어질 결말일지 언정 반짝이는 로맨스의 순간을 간직했다가 세월 속에서 추억하며 나이를 먹는 것이다. 혹은, 해피엔딩을 위안 삼아 우리 삶 속에 영화의 어떤 장면들이 반영되기를 그리면서. 

연민이 가는 한편, 그런 식으로 위로 하는 것이 싫다. 신파는 사절이다. 서글프고 찡한 현실이기도 하지만, 세상 다 산 사람처럼 '어차피 다 그런 거야'로 퉁치는 것이 싫다. 차라리 가차 없이 냉혹한 편이 마음이 편해진다. 그래서 우리는 로맨스보다 느와르에 손을 댄다. 어딘가 내가 발 디딘 땅이 물컹해지는 날이면 찾는 영화가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_pV6zRGeeGM

세상에 이런 영화가 있다는 건 행운이 분명하다. 두 남녀는 여러 차례 만나지만, 여자는 단 한 번도 그에게 마음 준 적이 없다. 죽은 친구의 연인에게 끌리는 홀리. 달콤한 눈빛과 노골적인 플러팅 공세로 그녀가 넘어올 거라 예상하지만 로맨스의 법칙은 깨진다.

무표정하게 걸어 나오는 그녀가 상대방의 기대를 처참하게 밟고 간다. 이토록 우아하고 도도하게. 

힘들이지 않고도 아주 가볍게 완벽함이 실현된다. 그의 자존심은 분노의 담뱃재처럼 길바닥에 내팽개쳐진다.

로맨스에 대한 기대감을 채워준 순간은 없었지만, 오히려 그 점이 매혹적이다. 자그마치 1949년부터 사람들은 장면에 열광했다.(1940년대에 이 정도의 세련됨이라니!) 그렇게 영화사에 남을 라스트씬으로 자리 잡았다. 무너진 시대적 가치관은 스크린에서 이런 식으로 살아난다. 그렇게 고전이 된다. 


2. 폐허의 땅에서 살아가는 법

이탈리아는 30년간 보르자 가문의 압제를 겪었지. 전쟁, 살인, 테러, 피바람을 겪었지만 미켈란젤로, 다빈치, 르네상스를 만들어냈어. 스위스에는 형제애가 있었지. 민주주의와 평화를 누리며 500년을 보냈지만 그들이 만들어낸 게 뭐가 있나? 뻐꾸기시계뿐이지.   

-<제3의 사나이> 중 해리의 대사


거리엔 '모차르트'라는 이름의 카페가 있는 비엔나. 한 때 예술인과 지식인들이 모여드는 수도였지만, 전쟁은 모든 것을 바꾸어놓았다. 2차 대전 후 4개 승전국의 분할 통치를 받아야 하는 그곳엔 암울한 그림자가 드리워져있다. 감시가 섞인 이웃들의 제각각의 언어가 일상의 불안으로 자리 잡는다. 

도시의 겉모습만 폐허가 된 것은 아니었다. 권성징악이 무너지고 가치관은 혼란의 폭풍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의심과 불안이 매캐한 안개처럼 자욱한 거리. 한낮마저도 깜깜하게 다가오는 느와르가 현실이 된 세계. 그곳에 미국인 이류작가 홀리가 도착한다.

친구 해리를 만나러 왔을 뿐인데, 뜻밖에도 그의 사망소식을 듣는다. 이럴 때 직업정신이 발동한다. 해리의 사망에 얽힌 미스터리를 풀기 위해 형사도 만나고 그의 연인 안나도 알게 된다. 이 사건을 통해 홀리는 친구 해리가 자신이 알던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에 부딪힌다. 그동안 그가 알던 사람은 누구였는가. 페니실린을 밀매에 연루되어 돈을 버는 악행을 일삼는 범죄자가 그의 친구였다니. 

죽은 줄 알았던 해리와 마주하는 순간, 그는 반성은커녕 오히려 당당하게 동업을 권한다. 매혹적인 대사다. 전쟁이 끊이지 않던 이탈리아에서 르네상스가 태동했을 때, 평화만을 외치던 스위스에는 뭐가 있었던가. 너는 어느 쪽에 서고 싶은가. 상대를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 것이 전쟁의 상식이듯 전후 시대 역시 절대적인 상식이나 윤리 역시 희미해져 간다.


해리의 연인 안나는 고통의 시간을 견디고 있다. 그녀는 연인이 범죄자였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흔들리지 않는다. 홀리는 사건을 추적하면서 안나에게 끌리지만, 그녀는 받아주는 척조차 하지 않는다. 

홀리에게 남은 선택은 두 가지뿐이다. 범죄자로 살아가는 친구를 옹호할 것인가, 그를 배반하고 경찰에 넘김으로써 정의를 실현할 것인가. 


3. 압도적인 빛과 그림자, 의리와 정의 사이


죽은 줄 알았던 해리는 살아있었다. 도시의 암흑 사이 구두 위에 앉은 고양이 위로 불빛이 돌 때 찰나처럼 보이는 그의 등장은 압도적이다. 어둠으로 인해 더욱 환한 램브란트의 그림처럼 이 빌런의 쫓기는 발길은 음지를 헤매지만, 모든 이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점점 더 많은 공권력이 투입되고, 홀리는 정의의 편에 점점 발을 담그며 친구를 추격한다. 

하수구 속에서 어른 거리는 그림자와 이를 쫒는 다급한 발자국 소리와 방향을 짐작하기 어려운 울림이 주는 공포. 하수구 덮개 위로 삐죽 솟아오른 간절한 손가락이 기괴한 풍경이 될 때 즈음, 두 친구는 눈이 마주친다. 일생일대의 결정의 순간이다.

해리는 그렇게 말했다. "우린 영웅이 아니야. 이 세상은 영웅을 원하지 않아." 

홀리는 빌런으로 드러난 친구의 세계관에 총알을 날린다. 그는 영웅의 순간을 향해 직진한다. 과연, 그가 써왔던 이류 소설을 뛰어넘는 현실을 완성할 것인가.


4. 영웅은 언제나 환영받는가


영웅이 된 홀리에게 무엇이 다가올까. 친구를 배신하고 정의와 신념이라는 원칙을 지킨 그에게 남겨진 것은 무엇일까. 조국도 아닌 유럽 한복판에서 그는 일생의 순간을 맞았다. 어깨는 한껏 높아지고 목소리는 견고해졌다. 

두 번의 장례식이 반복되는 공포영화 같은 현실이지만, 기시감은 들어도 제법 익숙하다. 빌런을 묻고 돌아오는 길은 갈 때와는 분명히 다를 것이다. 영웅에게는 어김없이 로맨스가 따라오는 법.

달리던 차에서 홀로 걸어가는 안나를 봤을 때 홀리는 그 어떤 소설보다 멋진 엔딩을 떠올렸을 것이다. 차를 멈추고 내려서 다시없을 해피엔딩을 위한 포즈를 취한다.

자신의 신념 속에서 홀리는 영웅일지 모르지만, 그 스토리는 혼자 완성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비엔나에서 홀리의 전지적 작가 시점은 어긋난다. 안나의 시점에서 그는 안나 자신도 아니고 연인도 아니고 영웅도 뭣도 아니다. 심지어 그는 전쟁을 겪지도 않았던가. 그저 그는 제3의 사나이일 뿐.

그렇다면, 안나는 범죄자라는 사실을 알았어도 해리를 계속 사랑했던 것일까? 

그녀는 한눈팔지 않고 걸어가던 마지막 발걸음의 이유를 이미 말한 적이 있다. 


"더 이상 그를 원하지 않아요. 하지만 그는 나의 일부가 됐어요."



*<제3의 사나이, 1949>는 왓차, 웨이브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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