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발점을 정하는 방법을 배우고 싶어
만나는 것이 여행이 되는 사람이 있다.
그를 거치는 것은 여행을 하는 것이다. 이디스를 만나고 오는 날은 일부러 걸었다. 차를 타고 순식간에 장소 이동을 하면 그에게 들었던 이야기들이 금세 흩어져버릴 것 같았다. 도로의 소음을 배경으로 플라타너스 아래로 걷다가 고궁의 담벼락을 마주치고 한복 입은 관광객들을 바라보다 낡고 오래된 골목으로 들어섰다. 작은 가게에서 녹는 아이스크림을 하나 샀다.
이디스와 나누었던 이야기들이 눈앞에 마주치는 풍경 속에서 살아났다. 그는 불평하지도 후회하지도 않았다. 밀려드는 폭풍에 맞서 전력질주했고 고군분투 끝에 목적지에 도착했다.
다만 길을 잃은 것이다. 무엇을 잃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았지만 놓쳤다는 감각만은 또렷했다. 다른 사람은 찾아줄 수 없고 오직 스스로 만져야만 했다. 이디스는 자신의 삶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대로 눈 감아버리거나 그저 지나가도록 기다리지 않았다.
내가 이디스의 고통을 전부 다 이해한다고는 할 수 없지만 남에게 해줄 내 이야기가 있다는 것은 크게 다가왔다. 그것은 어느 정도는 자신을 알고 있다는 뜻으로 들렸다.
한 시간 가까이 걸어서 집에 도착했다. 아스팔트를 뜨겁게 달구던 한낮의 태양도 누그러져 노을빛으로 번져가고 있었다. 나뭇잎들은 바람에 가볍게 흔들렸다. 창을 열고 큰 숨을 들이마신 후 그대로 책상에 앉았다. 노트북을 열어 타박타박 자판을 두드린다.
안녕하세요, 출발점을 찾고 있는 졸업준비생입니다.
인생의 계절에서 꽃피는 시기는 각각 다르다고 배웠지만,
출발점을 어떻게 정해야 하는지는 배운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선택의 순간은 왔고 행동을 해야 하는 시점에서
다른 모든 것들이 사라져도 마지막까지 남기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다가
어린 시절 아버지가 낭독해 주시던 그림책에 있던 키플링의 시를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만약에 네가 쌓아 올린 모든 것을
단 한 번의 내기에 걸었다가
다 읽고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네가 잃은 것에 대해 단 한 마디 불평도 하지 않을 수 있다면
만약에 네 심장과 감각과 근육에 힘이 없어진 뒤에도
제 몫을 다하게 할 수 있다면
네 안에 남은 것이 “그래도 버텨라!”라고 외치는
의지밖에 없을 때도 버틸 수 있다면
- <만약에> 중에서, 러디어드 키플링
네가 잃은 것에 대해 단 한 마디 불평도 하지 않을 수 있다면.
이 대목에서 떨리던 아빠의 목소리를 기억합니다.
또 자신에게 주어진 여정 속에서 후회 없이 불평 없이 길을 찾고 있는 제 친구를 떠올립니다.
자기소개서를 쓰는 일은 가장 어렵습니다.
불평하지 않고 나아갈 수 있는 그 출발점을 이렇게 시작해도 될까요.
제가 해보고 싶은 일에 대한 기획서를 하나 첨부합니다.
그렇게 '메일 전송'을 클릭했다.
기다림 역시 일이라고 했던 누군가의 말이 떠올랐다.
Nick Drake - Day is done
https://www.youtube.com/watch?v=Y2jxjv0Hkw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