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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리티 Jul 01. 2024

시들어가는 꽃의 향기를 그리고 싶어

'그림에서 시들어가는 꽃의 향기가 났으면 좋겠다.'


초머가 그날 붓을 들었을 때 담고 싶은 것은 오직 하나였다.

부다페스트의 광장에서 늘 연주를 하던 악사들이었지만, 오월의 햇살이 눈부시던 그날의 거리에는 낯선 연주자가 끼어있었다. 초머는 눈을 살짝 찡그리며 그들을 바라본다. 중절모에 수트를 갖추어 입은 남장여자 캐롤은 바이올린을 매만지며 조율하고 있었고, 비쩍 마른 중년의 반도네온 주자 안드레아는 최후의 연주를 위해 힘을 아끼고 있었다. 사실은 악단 모두가 안드레아를 위해 모인 것이었다. 캐롤의 친구인 첼로 주자 저스틴 역시 여행온 캐롤과의 약속 대신 이 무대를 선택했고, 시한부 삶을 준비하는 안드레아의 이야기를 들은 캐롤은 자연스럽게 악단에 합류하게 되었다.


그들의 연주는 길거리에서 흔히 들을 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대부분은 프로로 활동해 왔지만, 음악은 실력만으로 자리를 내어주지 않는다는 현실을 몸으로 터득한 이들이었다. 이 세계에는 언제나 톱의 자리를 놓치지 않는 스타들이 있다. 그들이 걸어온 길은 경탄할만한 것이었지만, 그 자리에 올라서지 못했다 해서 형편없는 음악가들이라는 뜻은 아니었다. 대부분은 다른 일로 생계를 이어가면서 아마추어의 자리로 제 발로 찾아온 이들이었다. 그들은 진정한 프로는 본질적으로 아마추어라고 여겼다. 

다만, 모나코에서 온 캐롤만이 완전한 아마추어라고 할 수 있다. 캐롤은 모나코 왕립학교에서 바이올린 레슨을 받은 것이 이때를 위한 것이라고 느꼈다. 언제 다시 올지 알 수 없는 알려지지 않은 거리의 축제. 캐롤은 왕실의 신분을 남장으로 완전히 지우고 광장에 섰다.  


초머는 모리스 위트릴로의 창백한 백색을 떠올렸다. 맑고 투명한 화이트가 아닌, 시들어가는 기운의 연약한 아름다움을 풍기는 마알간 백색. 그의 붓끝의 터치는 열정을 필터로 걸러서 악사들의 내면으로 파고들었다. 한번 지나치는 것으로는 알 수 없는 악사들이 보내온 세월의 심연이 초머의 백색에 스며들었다. 초머는 그 연주에서 들리는 수만 가지의 감정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알게 되었다.

 

깊은 슬픔.

우리는 그것을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해서 악기를 연주하고, 그림을 그리고, 노트를 끄적인다. 거리의 악사들과 무명의 화가가 그날 보고 들은 다채로운 감정들은 결국엔 깊은 슬픔으로 수렴되는 것이었다. 시들어가는 꽃의 향기, 남은 생명력을 끝까지 보여줄 수 있다면. 초머는 자신이 그 현장에 서 있다는 사실에 정신이 아찔해질 지경이었다.


"자, 그날의 얘기는 여기까지야. 이제 자네의 차례일세. 그래서 이 그림을 모나코 공주 캐롤과 시한부 환자 안드레아 중에 누구에게 주었을까? 다시없을 자유를 누린 캐롤의 순간일까, 아니면 최후의 연주를 완성한 안드레아의 순간일까."

초머는 커피잔을 들며 마자르와 수지를 번갈아 보았다.

마자르는 매일 그 그림 앞에서 보낸 갤러리에서의 시간을 떠올렸다. 왜 유독 그 작품 앞에서 발 길이 멈추었는지가 손에 잡혔다. 시든 꽃에서부터 들려오는 선율과 향기, 그리고 초머가 담아낸 창백한 백색이 모두 그 작품 안에 하모니를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수지는 마자르를 바라보았다. 이 질문은 그를 향한 것이었다.

마자르는 초머의 이야기를 들은 것만으로 이미 베일을 벗은 그림이 손에 잡혀서, 실물의 주인이 꼭 자신이 아니어도 될 듯한 이상한 자부심이 들었다. 어쩌면 자신보다 더 이 그림이 필요한 주인이 있다는 가능성이 감지되었다. 그래서 그는 망설임 없이 대답할 수 있었다.


"캐롤도 그 그림을 가지려고 하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마자르를 바라보는 초머의 눈빛이 고요해진다.

"시한부 환자 안드레아에게 소중한 그림이지만, 그 역시도 원했을지 의문이 듭니다."

"이런, 둘 다 아니라는 대답을 하려는 건가?" 초머의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수지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면 한 사람에게 주어져서는 안 되잖아요. 그 작품은."

초머는 파이프 담배를 숨처럼 들이마셨다.


"캐롤은 그림을 원했어. 그는 길거리에서 그런 자유를 누려 본 적이 없다고 흥분했었네."

수지가 물었다.

"그럼 시한부 환자는 어떡하고요?"

"처음엔 캐롤이 그림을 가질까 하다가 안드레아에게 양보했네. 그런데 안드레아는 받으려하지 않았어."

"왜요?"

"그 악사들은 모두 그날 '공연'이라는 현재를 살았기 때문에 그 경험으로 충분해진 걸세. 그림을 소유하지 않아도 이미 영원해진 거야. 그 사람들이 모두 그림이 된 거라고. 공연이 끝나고 그림을 한참을 보다가 우리는 헤어졌네."

수지와 마자르는 초머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현재에 온전히 머물 줄 아는 사람의 빛이 반짝인다. 그것은 분명 흔한 재능은 아니었다.  

"내가 안드레아에게 강제로 맡기다시피 해서 그가 갖고 있다가 결국 광장 옆의 작은 교회에서 치러진 그의 장례식에 걸렸네. 그렇게 교회에 남아있다가 점점 잊혀서 갤러리로 팔렸지."


창너머로 새로운 하루가 태어나고 있다. 동이 터오는 새벽의 하늘이 오렌지빛으로 채워진다.

그렇게 세 사람은 꽃은 시들어도 그 향기는 사라지지 않는 지구의 아침에 도착했다.



Astro Piazzola -Concierto Para Quinteto

https://www.youtube.com/watch?v=wyduxcwG9ow&list=RDwyduxcwG9ow&start_radio=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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