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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리티 Jun 24. 2024

문처럼 열리는 만남

밤하늘의 옅은 구름 사이, 말간 보름달이 고개를 내민다.


수지가 따라온 구름은 지금 부다페스트의 밤에 멈추어있다. 해가 떨어진 동네는 고요하다. 나뭇잎이라도 하나 떨어지면 소리가 들릴 듯한 적막이 감돌고 있다. 수지와 마자르는 파란 대문집 앞에 서 있다. 열어놓은 창가 커튼 사이로 옅은 빛이 새어 나온다.


두 사람의 실루엣이 보인다. 마자르가 수지를 어깨 위로 올려보니 창의 테라스에 수지의 손이 닿는다. 철제 발코니가 손에 잡히자 수지는 어릴 적 철봉에서 매달리기 하던 기억이 떠올랐다. 작은 화분들이 쓰러지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있는 힘껏 올라선다. 발을 딛는 사이 화분 위에 있던 돌조각들이 약간 쏟아져서 숨을 죽였다.

 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아, 안심이다. 테라스 아래를 보니 마자르가 벽돌 사이 발을 딛고 오르고 있다. 수지는 손을 뻗어 붙들어주었다. 마자르의 체중 때문인지, 긴장한 탓인지 두 팔이 부들부들 떨렸다. 곧 마자르는 사뿐하게 테라스로 넘어왔다. 까치발로 다가가 창가 옆 벽에 바짝 붙은 두 사람은 겨우 숨을 고르고 있다. 가만히 귀를 기울여보니 TV를 틀어놓은 소리가 흘러나온다.


이렇게 남의 집 창가에 서 있자니, 로미오가 찾아가던 줄리엣의 창가가 떠올랐다. 이국 땅에서 낯선 남자와 도둑처럼 잠입하고 있는 자신이 비교되어 풋 웃음이 났다. 마자르는 놀라서 수지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이제 다음 작전으로 가야 한다. 두 사람은 창안을 슬그머니 엿본다. 


TV가 아니라 라디오 소리였다. 아날로그 트랜지스터 라디오에는 삐죽한 안테나까지 솟아있었다. 어슴푸레한 조명 아래 낡은 소파, 벽에는 몇 점의 액자들이 걸려있었다. 구석에는 커다란 옷장, 바닥에는 물감과 화구들이 널려있었고, 책상의 의자 너머로 사람 머리 실루엣이 보였다. 화가일까? 거의 움직임이 없는 것으로 봐서 잠든 것인가.

시간을 오래 끌 수 없어서 두 사람은 살금살금 발을 들였다. 살짝 열린 창을 조심스레 바깥쪽으로 당겼고 드디어 바닥에 발이 닿았다. 마자르도 바로 들어왔다. 라디오에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 때문에 발소리가 묻혔다. 화가의 뒷모습이 보이는 책상으로 다가간다. 


"뭐야..." 

마자르의 말소리가 새어 나왔다. 수지를 보며 화가의 머리 쪽으로 손을 가리킨다. 수지도 가리키는 방향을 보다가 어이없이 웃는다.


흉상으로 된 석고 조각이었다. 그림자 실루엣으로는 그럴듯하게 사람처럼 보였지만, 가까이 다가서니 회백색 석고상이었다. 덥수룩한 머리카락과 수염, 널찍한 이마, 굳게 다문 입술, 흔히 보는 아그리파상은 아니었다.

혹시 화가 자신의 두상인가 보고 있는 사이 계단에서 올라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아무리 둘러봐도 숨을 곳은 하나였다. 두 사람은 구석의 옷장을 열었다. 허리를 조금 굽히면 들어갈 수 있다. 걸려있는 옷은 없고 이젤과 화구들이 놓여있었는데, 억지로 몸을 구겨 넣은 채 옷장을 닫았다. 오래된 나무 냄새가 나는 옷장 속에서 바짝 귀를 세운다.


삐그덕 문이 열리고 발소리가 울린다. 책상 위에서 소품을 만지는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급히 숨긴 했는데, 계획에 없던 상황이었다. 수지는 무릎을 살짝 굽히고 서 있자니 다리가 후들거리기 시작했다. 마자르도 힘들긴 마찬가지지만 수지의 팔을 붙들어준다. 수지는 더 버티기 힘들다는 눈빛을 보냈다.

갑자기 마자르는 결심한 듯 수지의 팔을 끌어 주저앉혔다. 수지가 옷장 바닥에 닿으면서 쿵-소리가 들렸다. 

하긴, 어차피 마주칠 일이었다.


발소리가 바짝 다가온다. 멈추자마자, 마자르가 먼저 옷장문을 열어젖혔다. 

옷장 프레임 밖으로 화가가 서 있다. 파이프담배를 물고 있는 숀 코너리를 떠올리게 하는 남자가 서 있다. 흰 수염으로 뒤덮인 얼굴에 눈빛은 매섭고 표정은 무심하고 담담했다. 사람의 눈빛이 번갈아가며 엉킨다. 

마자르가 먼저 웃어 보인다. 


"반갑습니다! 이렇게 만나게 되었지만."

"내 집에서 뭐 하고 있는 거지?" 화가의 목소리는 낮고 묵직했다.

"아, 죄송합니다. 이게 먼저겠죠. 그림 얘기를 하고 싶어서 좀 무리를 했어요." 


창가의 커튼이 바람에 날린다. 달빛이 창가로 들어와 바닥에 그림자가 물결치고 있다. 



Daft punk (Ft. Julian Casablacas) - Instant Crush

https://www.youtube.com/watch?v=a5uQMwRMH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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