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이 커피 잔에 닿아 반짝거린다.
빛은 낡은 잔의 흠집조차 눈부시게 바꾸어놓는다. 그 위로 아라비안 나이트보다 신비스러운 밤의 기억이 내려앉았다.
수지는 '삶은 당신이 잠들지 못할 때 벌어지는 일'이라는 어느 작가의 말을 떠올렸다. 화가의 집에 제멋대로 잠입해서 들은 이야기들이 꿈결처럼 아득해졌다. 아침 햇살이 커피 테이블까지 성큼 다가와 지난밤은 이제 과거가 되었다고 속삭인다. 잠들지 못해 몽롱한 기운 속에서 수지와 마자르는 계단으로 내려갔다. 초머는 그들을 따라 현관까지 배웅해 주었다.
현관문을 열고 나서자, 초머는 우편함을 열었다. 그가 집어든 고지서들 사이 낯선 봉투가 보인다. 발신인의 주소란이 비어있다. 우편물을 뜯어보는 초머의 미간에 살짝 주름이 간다.
"뭔가요?" 마자르가 물었다. 초머는 마자르에게 편지를 건네었다. 타자기로 쳐낸 글씨체였다.
'또 다른 작품이 완성되면 그 갤러리로 보내주세요. 내가 슬쩍해 갈 수 있도록 '
초머는 잠시 멍해졌다. 수지가 묻는다.
"전에도 이런 편지를 받은 적 있나요?"
초머는 고개를 저었다.
"그림을 이제 갤러리보다는 차라리 직접 공개하시는 편이 좋지 않을까요? 이제 그 갤러리는 더 믿을 수가 없네요. 그리고..." 마자르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
"기자들에게 그 작품 <거리의 악사들>에 대해 인터뷰하시는 편이 나을 것 같습니다. 어차피 알려지게 되어 있어요."
"그렇다면... 자네들이 써주면 어떻겠나? 나는 했던 얘기를 반복하는 걸 좋아하지 않네."
마자르는 초머에게 출판사에 다닌다는 소개를 했었다. 어쩌면, 수지와 마자르의 잠입은 어떤 의미에서의 초대였는지 모른다. 초머는 작품의 이야기를 자신의 방식으로 전해줄 메신저를 기다리고 있었을까.
수지와 마자르는 그렇게 초머의 집을 나왔다. 작품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그 그림이 더 보고 싶어 졌다. 수지는 팝스타 마고의 인스타에 들어가 <거리의 악사들>을 찾아보았다.
마고의 인스타에는 새로운 소식이 있었다. 세계 투어 리스트. 그가 활동하는 뉴욕을 시작으로 유럽의 주요 도시들 -아쉽게도 부다페스트는 없었다-그리고 아시아 투어 중에 서울이 있었다. 그리고, 이번 투어에는 그가 소장한 그림 <거리의 악사들>이 3D 그래픽으로 재연되어 무대배경이 될 것이라고 했다. 수지는 순간 서울의 거리에 울려 퍼지는 함성이 들리는 듯했다.
해질 무렵 나는 이디스와 정동의 돌담길을 걷고 있었다. 바람에 이디스의 긴 머리가 날렸고, 가로수길 사이 돌바닥에 들어온 작은 등들이 아스팔트의 징검다리처럼 여기저기서 빛나고 있다. 나는 수지에게 들은 얘기를 이디스에게 전했다. 그때 이디스의 전화가 울렸다. 액정에 뜬 이름은 'Margot'였다. 이디스는 조금 망설이는 듯하다가 전화를 받았다. 통화를 끝낸 이디스는 말했다.
"마고가 서울 투어에 꼭 오라고 하네."
"응? 누구? 서울 투어?"
그때까지도 나는 이디스가 팝음악 프로듀서였다는 사실을 한참 잊고 있었다. 팝스타 마고의 전화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이제 이디스는 예전 사람들을 다시 만나도 될 만큼 스스로를 다시 세운 것일까. 그는 덕수궁 돌담이 보이는 어느 낡은 건물의 작은 창고를 계약하여 피아노방으로 만들었다. 일제 강점기 시절 빨간 벽돌로 지어진 근대 건축물로 덕수궁 안에 있는 고종의 서재, 정관헌을 떠올리게 하는 독특한 건물이었다.
한국 전통 양식에 서양식 건축 기법이 도입된 예스런 건물의 가장 작은 창고.
그곳에서 이디스의 피아노가 노래한다.
Vanessa Carlton - A Thousand Miles
https://www.youtube.com/watch?v=Cwkej79U3e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