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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하 Apr 14. 2023

작가는 어떻게 읽는가

글을 쓰는 중입니다

 요즘 한참 단편의 매력에 빠져 있다. 장편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점진적으로 변화하는 인물들에 대한 감동을 담고 있다면, 단편은 때로는 하나의 공간에서 때로는 시간을 건너뛰며 인물의 극적인 순간을 담아내는 짜릿함이 있다.


 사실 나는 단편을 잘 쓰지 못한다. (그렇다고 장편을 잘 쓰는 것도 물론 아니다) 평상시 독서 습관이 단편보다는 장편 위주로 읽어서 그런지 짧은 분량 안에 내용을 압축해서 구성하는 게 장편보다 더 어렵게 느껴진다. 그런데 우연히 선물 받은 조지 손더스의 ‘작가는 어떻게 읽는가’를 읽으면서 학창 시절 문학 교과서 보던 느낌으로 지루하게 느끼던 러시아 대가들의 단편들이 재밌어졌다. 그 후로 유명 작가들의 단편을 찾아서 틈틈이 읽고 있다. 특히 그들의 초기 단편들부터 근래 단편까지 시간의 흐름에 따라 글들을 읽으며, 그들이 작가로서 일 보 전진, 일 보 후퇴를 지난하게 반복하며 이야기들과 씨름한 흔적들을 더듬어볼 때 큰 위안을 받곤 한다.


 근래 가장 위안이 된 순간은 톨스토이의 주인과 하인을 읽었을 때였다. 조지 손더스는 책에서 주인과 하인을 읽었으면 이 이야기의 소재를 얻은 직후 쓴 톨스토이 초기 단편 눈보라를 읽어보고 비교해 보라고 조언했다. 눈보라는 서점에서는 절판되었고, 근처 도서관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그리고 나는 이런 희귀한 아이템을 수집하는 걸 무척이나 좋아한다. 어렵게 손에 넣을수록 소유에 대한 성취도가 올라간달까? 결국 나는 눈보라를 찾아냈는데 발견 장소는 뜻밖에도 리디북스였다. 나에게 리디북스는 BL 장르로 유명한 웹툰, 웹소설 플랫폼이었는데 그곳에 톨스토이 초기 단편이 있다니 뜻밖이었다. 나는 리디북스 사칭하는 피싱 사이트는 아닐지 의심에 의심을 거듭한 끝에 결국 그곳에서 전자책을 샀다.


 눈보라와 주인과 하인은 모두 잘 쓴 단편이었다. 대문호인 톨스토이의 작품들이니 당연한 거 아니겠는가! 하지만 같은 소재임에도 불구하고 두 작품이 전달하는 감정은 전혀 달랐다. 

 눈보라는 톨스토이가 러시아의 들판에 폭설로 인해 아내와 함께 썰매에 갇힌 경험담을 토대로 쓴 단편이다. 그래서 바람이 거세게 왼편에서 불어와 말꼬리와 갈기를 옆으로 흩날리며 마부와 말발굽이 일으키는 눈을 세차게 휘몰아가는 1장부터 11장, “이렇게 모셔 왔습니다. 주인 나리!”라고 도착이면서 글의 마침을 리는 마부의 대사까지 나는 주인공과 함께 추운 러시아 들판 한복판에 있는 느낌이었다. 한 번도 러시아에 가본 적이 없는데도 눈보라의 문장들에서 숨을 들이쉴 때마다 폐까지 얼어붙을 것 같은 그곳의 추위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마부들이 길을 헤매면서도 유유자적한 모습을 보일 때마다 짜증이 치밀어올라 거친 말을 내뱉었고, 한편으로는 그들만이 주인공을 안전한 곳까지 데려다줄 수 있기에 주인공은 짜증을 드러내지 않기를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봤다.

 그리고 눈보라가 쓰인 지 40년이 지난 후 톨스토이는 이 소재를 활용해 주인과 하인이라는 단편을 썼다. 주인과 하인은 제목처럼 욕심 많은 재력가 주인과 주인의 횡포를 알면서도 모른 척 넘어가며 자기 처지에 순응하며 사는 하인의 이야기다. 이들은 눈보라의 배경과 똑같이 눈 쌓인 러시아의 들판에 갇혔지만, 들판에 갇히게 된 이유는 순전히 자기중심적인 주인 때문이다. 두 사람은 위기 상황에서 몇 번이나 근처 마을로 몸을 피할 수 있었지만, 그때마다 주인은 번번이 오늘 꼭 목적지까지 가야 한다며 하인을 재촉해 썰매를 출발시킨다. 그러다 도저히 움직일 수 없는 극한의 상황에 몰리게 되고, 주인은 하인을 버리고 혼자 썰매를 몰고 도망치나 같은 곳을 뱅뱅 돌뿐 탈출구를 찾을 수는 없다. 결국 죽음의 공포가 턱밑까지 밀고 올라왔을 때 주인은 심적으로 극적인 변화를 맞이하며 버렸던 하인을 자기 몸으로 감싸며 하인을 살리고 자기는 죽는다.


 눈보라는 길어봤자 반나절 동안 눈보라 속에 썰매를 타고 길을 헤맨 촌극을 보여준다. 곤란한 상황을 겪는 주인공의 마음에 공감하고, 누군가에게 눈보라가 어떤 이야기인지 쉽게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읽고 나서 오래 기억에 남지는 않았다. 

 주인과 하인은 둘의 일방적인 관계부터 두 사람을 눈보라 속으로 계속 뛰어들게 만드는 마을에서의 일들, 그리고 마지막 하인을 구원하는 주인의 심적 변화까지 어느 문장 하나 나에게 긴장감을 늦출 수 없게 했고, 사람의 삶과 죽음의 순간에 대해 나에게 많은 철학적인 질문을 던지며 몇몇 장면은 계속 도돌이표처럼 돌아가 다시 읽게 했다. 하지만 주인과 하인이 어떤 이야기인지 쉽게 설명할 수 없다.


 올해 단편에 매진 중이다. 그중 한 작품이라도 눈보라 수준의 촌극이라도 읽는 이들이 공감할 수 있는 글을 쓸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세월이 쌓여 40년 뒤에는 주인과 하인 같은 명작은 아니더라도 올해보다는 더 나아진 글을 쓰고 있는 내가 있기를 바란다.     


 나는 글을 쓰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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