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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하 Feb 20. 2024

과거로 가는 차, 미래로 가는 커피

서하의 On-Air

 '고통 없는 사랑은 없다'라는 정호승 시인의 시가 있는 산문집을 읽고 있습니다.

 서점에서 중년 남성 분이 고등학생 자녀분을 데리고 와서 이 책을 사주기에 호기심이 일어 그날 구입했습니다.

 가끔 이렇게 손님들이 구입한 책을 따라 읽는 재미가 쏠쏠하답니다.

 책은 편과, 시에 대한 시인의 두, 페이지 짧은 생각이 담긴 산문이 4부, 17편씩의 글에 담겨 있어 꽤 두툼합니다.

 이 책을  매일 한 편의 시는 필사하고, 한 편의 산문은 읽고 명상하며 잠들어 있는 생각과 감정을 흔들어 깨우는 자명종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 중 차나 한 잔이라는 시와 그에 딸린 홀로 있는 시간이라는 산문이 무척 마음에 들었습니다.

 밑줄 친 문장 중에는 이런 문장이 있습니다.


 차는 내 마음속에서 강물과 바닷물이 만나듯 내 과거를 현재의 세계와 중화시킨다.


 이 문장을 읽는 순간 은퇴한 수의사님이 차린 은평구 찻집에서 차담을 나누었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칠십대 백발 노신사와 그 절반의 인생밖에 살지 못한 저는 은퇴를 주제로 서로의 과거로 돌아갔었습니다.

 행복했던 과거이든, 슬픈 과거이든 과거는 지난 시간에 흐르고 있는 작은 강물 줄기일 뿐이고, 찻물을 타고 흘러온 그 강물 줄기는 현재라는 바닷물을 만나 도란도란 이야기 꽃을 피우며 중화된 새로운 과거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가끔 홀로 차를 마실 때나 이렇게 책 속에서 차에 관련된 이야기가 나오면 그 밤의 농익은 차 향이 희미하게 생각납니다.

 사실 저는 차보다 커피를 먼저 좋아했습니다.

 로스터리 카페가 흔하지 않던 시절 회사 뒤편에 작은 로스터리 카페가 생겼는데 로스팅실 커피향이 마음에 들어 자주 드나들다가 핸드드립에 푹 빠졌던 기억이 있습니다.

 하루의 시작이나 사무실에서 머리가 복잡해질 때면 핸드밀로 원두를 갈아 드리퍼에 필터를 끼우고 온도를 맞춘 뜨거운 물을 드립주전자에 담아 천천히 커피를 서버에 내릴 때면 공간에 퍼지는 커피향이 포근하게 감싸안아주는 느낌이 들곤 했습니다.

 신기한 건 차와 달리 커피를 마시면 생각의 방향이 과거가 아닌 미래로 향한다는 것입니다.

 해결할 수 없을 거 같던 문제에 대해 시도해 볼 만한 방법들을 조언하고, 한 번 실행에 옮겨보라고 등을 두들겨 주는 친구, 커피는 그 당시 저에게 그런 존재였습니다.


차를 즐긴다는 것은 인간과 인간의 삶을 바라보는 긍정의 눈을 갖는다는 것이다.

 

 현실에는 차 향기 나는 과거도, 커피향 나는 미래도 섞여 있습니다.

 상황에 빠르게 대응만 하며 삶을 소진하다보면 어느 새 삶의 찻잔은 텅 비어버릴 겁니다.

 오늘은 나를 위해 과거로 가는 차 한 잔이든, 미래로 가는 커피 한 잔이든 삶의 찻잔에 가득 담아 음미할 수 있는 하루가 되길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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