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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하 Feb 13. 2024

생일 풍경

서하의 On-Air

 설 연휴는 즐겁게 보내셨나요.

 저희 집은 명절도 딱히 평일과 다르지 않은 분위기입니다.

 그래서  조용히 휴식을 취하며 밀린 책도 읽고, 여러 생각을 글로 정리하며 보냈습니다.

 설이라고 위층에 손주들이 왔는지 왁자지껄 아이들이 떠들며 뛰어다니는 소리가 정겨워 귀기울이기도 하고,  근처 풍경 좋은 카페가 고맙게 연휴에도 문을 열어 주어 잠시 커피향 속에서 책을 읽다보니 연휴가 솜사탕처럼 달콤함만 남기고 사르르 녹아없어져 버리네요.


 설 연휴 전 주는 제 생일이었습니다.

 봄이 온다는 입춘에 태어난 저는 생일이면 추위 속에 젖은 머리를 내밀고 떨고 있는 새싹처럼 몸을 움츠린 채 겁 먹은 표정으로 지내곤 했습니다.

 노산에 조산, 제왕절개로 아랫배에 큰 흉터를 남기며 절 낳은 어머니에게 제 생일은 그녀 인생에서 가장 슬픈 날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거의 제정신으로 그 날을 보낸 적이 없습니다.

 그런 어머니를 저는 두려워 합니다, 그런 어머니를 아버지는 저보다 더 두려워 하고요.

 그래서 그날은 숨소리조차 내지 않고 어머니의 심기를 살피며 지나곤 했습니다.

 가장 힘들었던 생일들은 삼십대였습니다.

 스스로를 돌볼 틈도 없이 바빴기에 다른 이에게 내어 줄 마음도 없던 그 때.

 회사에서 복지로 주는 생일 케이크와 꽃다발을 들고 늦은 밤 집으로 돌아 와 혼자 케이크를 먹던 날들이 생각납니다.

 그래서 번아웃으로 잠시 인생의 시간이 멈추었을 때 부모님에게 처음으로 떼를 써 보았습니다.

 내 생일이라고, 내가 태어난 날인데 축하는 기대도 하지 않으니 평온하게라도 보내고 싶다고.

 어린아이처럼 발을 구르며 떼를 쓰면서 알았습니다.

 사실 부모님에게 가장 축하받고 싶었구나, 나의 탄생을 인정받고 싶었구나.

 그래서 부모님 생일을 캘린더에 저장해 놓고 비싼 생일 선물을 하려고 노력했구나.

 부모님 생일을 진심으로 축하한 게 아니라 내 생일을 인정받고 싶어서 아부를 떨고 있었구나.

 나는 아직 철들지 못한 어린 아이였구나.

 제가 진심으로 누군가의 생일을 축하해본 적이 없다는 걸 그때 깨달았습니다.

 그 해부터 였습니다.

 지인들의 생일에 특별한 생일 선물을 해주지는 못해도 잊지 않고 먼저 진심으로 축하인사를 건네기 위해 노력하기 시작한 것이.

 올해 입춘이 오기 이틀 전, 저희 개들과 산책 길에 진돗개 공격을 당하는 사고가 있었습니다.

 사람은 다치지 않았는데 제 반려견들이 크게 다쳐 정신없이 동물병원을 다녀오고, 병원비를 내어주지 않는 진돗개 견주와 악을 쓰며 싸우고, 서점 알바는 한 시간이나 지각한 그런 혼란스러운 날이었습니다.

 알바 중인 저에게 한동안 소식이 뜸했던 지인이 치킨 쿠폰과 함께 생일 축하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곧 생일인데 치킨을 잘 먹는 거 같아서 보낸다며 생일을 축하한다는 간결한 메시지에 그날 하루 상한 마음에 연고가 발라집니다.

 생일 전날에는 또 다른 지인이 소고기를 선물해주었습니다.

 동네방네 식탐이 소문난 듯 싶습니다.

 생일날에는 아침에 아버지가 쭈뼛쭈뼛 지갑을 열며 십만원에서 만원이 모자른 구만원을 용돈으로 쥐어주며 이렇게 말합니다.

 "아빠도 지금 돈이 이거 밖에 없어. 비상금으로 만원은 가지고 있어야지."

 십만원을 주고 싶은데 채워주지 못한 미안함을 그렇게 표현한다는 걸 이제는 이해하고 싶지 않아도 이해하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아버지 역시 부모에게 태어남을 축하받지 못하고 자랐기에 축하하는 방법을 모른다는 것도.

 그래서 넉살 좋게 감사인사를 전하며 아버지 손에서 구만원을 낚아채 와 얼른 지갑에 챙겨 넣었습니다.

 그 주는 아버지의 용돈으로 조금 더 풍성한 밥상이 되었습니다.

 서점에 출근하니 근처에 온 지인이 깜짝 방문해서 달콤한 젤리를 쥐어주고 바쁘게 다음 일정을 위해 사라집니다.

 그리고 명절 연휴에 출근한다고 서점 사장님이 특별히 하루 더 내어 준 꿀같은 삼일간의 휴가가 시작되었습니다.

 첫날은 오래 알고 지낸 친구와 문구를 쇼핑하고, 카페에서 수다를 떨었습니다.

 둘째날은 다정한 지인 언니가 직접 만든 고구마 빵을 선물 받고, 맛있는 점심을 먹었습니다.

 셋째날은 행복했던 기억들을 잊지않기 위해 감사한 마음을 글로 적었습니다.

 그렇게 꿈꾸던 평온한 생일 주간이 현실이 되었습니다.

 십대, 이십대, 삼십대 때 항상 외로움만 가득한 생일이 돌아오는 게 두려웠는데 어느 새 정신차려보니 사십대에 생각지도 못했던 평화롭고 사랑 받는 생일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태어남은 어쩔 수 없는 많은 변수들로 인해 인정받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태어남을 이렇게 다시 정의해 보는 건 어떨까요?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익어가는 것이라고.

 매 어가며 인간으로서 성숙해가는 걸 축하하는 날이 생일이라고.

 그래서 올해 생일보다 내년 생일에 더 성숙한 행복이 찾아올 것이라고.

 그리고 존재를 인정받지 못해 슬퍼하는 분이 다면 잊지 마세요.

 아마 당신이 보지 못할 뿐, 당신 주변에 당신을 아끼는 많은 사람들이 축하인사를 건넬 준비를 하고 있을 거라는 것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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