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좋아하는 건 있어요
오늘은 계 탄 날이다. 평소 길어도 낮잠은 한 시간 이상을 자는 법이 없는 그녀가 세 시간째 숙면이라니!
여느 날처럼 신생아인 둘째를 내 배 위에 올려두고 먼저 핸드폰으로 자주 가는 카페에 한 번씩 들어가서 새로운 글이 있나 쭈욱 스캔을 한다. 마침 똑 떨어진 쌀과 생수 구입을 위해 빠른 배송으로 유명한 쇼핑 사이트에서 약 삼십 분 정도 가격비교 후 구입 완료. 그런데도 그녀는 아직 곤히 자고 있다. 흠 그렇다면, 며칠 전 산 책 중 가장 가벼워 보이는 거 한번 읽어볼까?
오랜만에 가벼운 에세이를 읽으니 생각보다 술술 책장이 넘어가고, 한참 읽다 보니 커피 생각이 절로 난다. 자고로 양꼬치엔 칭다오, 책 읽을 땐 커피지! 그녀가 깰까 봐 조심스럽게 커피머신에 물을 붓고 캡슐 하나를 툭 떨어뜨린 후 추출 버튼을 꾹 누르니 윙- 하고 제법 큰 소리가 난다. 뜨거운 아메리카노 한잔이 금방 나왔다. 휴- 하느님 감사합니다. 다행히 아직도 그녀는 깨지 않았다. 요즘엔 참 작은 것에도 하느님께 감사한다.
예전 같았으면 아기를 안고 뜨거운 커피를 마실 생각은 절대 못했을 거다. 둘째이다 보니 베짱이 좀 생겼다고나 할까 한껏 대범해진다. 소파 팔걸이에 커피잔을 올려놓고 홀짝홀짝 마셔본다. ' 아- 이 카페인 냄새... 오늘따라 왜 이렇게 중후한 맛이지.' 커피 잔 안에서 저 멀리 네팔의 어느 아라비카 커피 농장에서 온듯한 원두의 진한 향이 느껴진다.
원래 아메리카보다는 라떼를 즐겨먹지만 오늘은 쓴 커피를 느껴보기로 한다. 제법 괜찮네. 여기에 어제 편의점에서 2+1으로 산 초코 블랑 쿠키 한 개를 곁들여 먹으니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다. 소확행이란 게 이런 걸까. 책 한 권과 커피 한잔 그리고 배 위에서 새근새근 자고 있는 아이. 이 조합이 이렇게 달달할 줄이야.
둘째로 인한 출산휴가도 벌써 두 달이 지났다. 처음에는 나태해질까 봐 어릴 적 동그란 시계 모양의 방학시간표 그리듯 일일 시간표를 계획해 보기도 했다. 집에서도 회사 다닐 때처럼 긴장을 늦추지 않고 알차게 보내겠다는 의지를 굳히며 그 패턴과 똑같이 해보기로 말이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9시 출근 대신 집안일 시작, 12시 점심식사, 6시 퇴근 대신 조금 앞당겨 5시 첫째 하원 및 둘째 케어 종료. 이렇게 머릿속으로 시간을 정해놓았는데 신생아와 둘이 집에 있다 보면 당연히 변수가 생기기 마련. 처음에는 이 허울뿐인 계획이 지켜지지 않을 때마다 우울하기도 하고 초조하기도 했다. 이렇게 하루를 비생산적인 일들만 하다가 시간이 훌쩍 지나갈까 봐.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나 혼자 나를 채근하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돌보지 못하고 산다. 쉬는 날에도 어떻게 쉬어야 할지 모르고, 진짜 휴식이 뭔지도 알지 못한다. 주위를 둘러보면 열심히 일하는 사람밖에 없는데, 정작 자기 삶에 만족하고 사는 사람은 없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더 많이 쉬어야 한다. ‘내가 이러고 있어도 될까?’라는 의문은 늘 애매하게 쉬기 때문에 드는 생각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누구보다 먼저 자신을 돌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내 맘 같지 않은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나의 몸과 마음, 기분과 생각을 스스로 돌볼 수 있어야 한다. 때로는 상황이 예상과 다르게 흘러가도, 그 안에 있는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아도 나는 나니까. 잘 지내든 그렇지 않든 나는 나와 평생 같이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 아무것도 안 해도 아무렇지 않구나/김신회/놀
책 속 구절을 읽으면서 나의 문제점을 알게 되었다. 나를 돌보지 않았다는 것. 열심히 그리고 꾸준히 달리고는 있는데 정작 그 종착역에 나는 없었다는 것. 겉보기에 썩 괜찮은 나 말고 진정 평안하게 웃고 있는 나 말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 나를 편안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고 오로지 나 스스로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다는 것도.
“취미가 뭐예요?”
소개팅 나갈 때마다 듣는 단골 질문이다. 그때마다 난 뭐라고 대답했더라.
“여행이요. 영화 보는 것도 좋아하고요”
딱히 취미가 없던터라 늘 그렇게 얘기했다. 여행이나 영화 이야기가 그나마 낯선이 와 대화하기에 괜찮은 주제이기도 했고.
근데 결혼하고 살면서 내가 취미라고 말했던 것들이 초라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남편은 호기심이 많은 편이다. 그것도 매우 많이.
나름 국내 여행지 곳곳과 유럽을 비롯한 유명한 해외여행지는 남들만큼 다녀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남편은 국내도 남들이 가지 못한 섬마을 같은 곳을 몇 번씩 다녀오기도 하고 인도, 태국, 유럽의 수많은 나라의 한 도시에서만 몇 달씩 체류하면서 그 나라를 깊이 있게 경험한 탓에 나와는 체험의 깊이가 달랐다.
영화나 드라마를 고를 때도 좋아하는 장르만 즐겨보는 나와 달리 남편은 자기가 무슨 영화평론가라도 되는 양 생전 처음 들어보는 여러 나라의 독립영화부터 유명한 국내외 영화와 드라마를 두루 섭렵하고 있었다. 음악은 또 어떻게 그리 많이 들었는지 길거리를 지나다가 또는 카페에서 나오는 음악들 중에 가요부터 클래식, 재즈까지 모르는 노래가 없었다. 거기다 본인이 취미라고 말하는 사진은 거의 사진작가 수준이라 가끔 인물사진이나 건물 사진을 찍어주고 내 월급만큼의 돈을 아르바이트비로 벌어오기도 했다.
그러니 남편 앞에서 내가 내세우는 취미라고 하는 게 참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나도 뭔가 취미를 만들어보려고 우쿨렐레도 배워보고 요가나 필라테스도 다녀보고 그림도 배워봤지만 다 그때뿐이었다. 그렇게 나는 내가 좋아하는 걸 찾지 못한 채 취미라는 단어를 잊고 지내고 있었다.
마이 페이버릿 씽. 사실 내가 좋아하는 건 따듯한 커피 한잔 마시면서 책 읽기. 단지 그거였다. 책과 더불어 서평도 쓰고 토론도 하고 필사도 하고. 그런 시간이 좋았다. 그래서 대학 졸업 후 어렵게 준비해서 합격한 회사 입사도 마다하고 도서관 사서가 되기로 결심했다. 사서가 되지 않았다면 아마도 출판사나 북카페 같은 곳에서 일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때로는 진짜 몰입하고 있으면 정작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다는 생각이 들만큼 머리가 텅 빌 때가 있다. 진정으로 즐기고 있기 때문에 그게 스트레스로 다가오지 않고 시간도 금방 지나간다. 그런 일이 있다면 그게 취미지 뭐 별게 있나. 또 취미가 없으면 뭐 어때. 잘 먹고 잘 사는 데 있어서 취미가 꼭 필요하지는 않으니 말이다.
진짜 필요한 건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내가 찾아 가게 된다. 내가 좋아하는 게 뭔지 찾았다면 살아가면서 가능한 한 많은 시간을 그 좋아하는 것으로 채우면 그만인 것. 더 이상 나를 불안하게 하는 계획표 따위는 집어던지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