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입사원 연수가 끝난 후 부서별로 사원들이 배치되었다. 미소는 당연히 한준혁 과장의 팀으로 발령을 받았다. 그의 로비가 들어간 것이 분명했으나 어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때부터 준혁의 초딩 같은 괴롭힘이 시작되었다.
"미소씨가 이해해. 한과장님 알고 보면 좋은 분이셔."
"대체 어디 가요? 틈만 나면 혼내시는데."
"처음엔 나도 많이 혼났어. 생각해 보면 피가 되고 살이 되는."
"박대리님 꼰대죠?"
"아니. 나는 그런 말이 아니라."
그때부터였을까? 미소는 박대리에게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갈궈대는 한과장의 방패가 되어준 사람. 그랬던 사람이. 어떻게 수민이랑 사귈 수가. 하지만 미소는 수민에게 차마 말하지 못했다. 왜 그랬냐고 묻지 않았다. 수민과의 사이가 멀어질까 두려웠다. 적어도 그땐 이렇게 크게 뒤통수를 칠 줄은 몰랐으니까.
일주일 뒤
"그 얘기 들었어?"
"무슨 얘긴데?"
"박대리님 이직하신데. 이번달까지만 출근한다고 하던데."
이게 갑자기 무슨 소리? 구내식당 한편에서 밥을 먹고 있던 미소는 박대리의 이직 소식에 화들짝 놀랐다. 회사를 옮긴다고? 말도 안 돼.
밥을 먹다 말고 일어섰다. 목이 메어 도저히 음식을 삼킬 수가 없었다. 나만의 남자는 아니었지만볼 수 있기에 버틸 수 있었다. 구내식당에 울려퍼지는 노래가 구구절절 자기 이야기인 것만 같았다.
'죽어도 못 보내.' 그래 이대론 못보내지.
사무실로 올라와 박대리에게 보낼 메시지를 적었다.
- 박대리님. 오늘 저녁에 시간 있으세요?
아니지 아니야. 애써 쓴 메시지를 썼다 지웠다.
- 박대리님. 잠깐 옥상에서 봬요.
누를까 말까 고민을 하고 있었는데 미소를 부르는 준혁의 목소리가 들렸다.
"공미소씨!"
점심시간 아직 안 끝났는데!
"네!"
놀란 손가락이 휴대폰의 전송 버튼을 누른 지도 모른 채 준혁의 자리 앞으로 달려갔다.
"내 옆으로 좀 와볼래요?"
"네? 과장님 옆이요?"
"작년 데이터에 문제가 좀 있는 것 같아서요. 크로스로 체크해 보죠."
미소는 준혁의 옆자리 의자에 앉았다. 신입사원 연수 때 이후로 이렇게 가까이에서 한 과장을 본 건 처음이었다. 뽀송뽀송한 냄새가 미소의 코를 찔렀다.
'성격만 좀 좋았어도.'
성격이 좋으면 뭐? 정신 차려 공미소.
"뭐 합니까? 안 부르고."
"아! 이 자료 보고 말씀 드리면 되는 거죠?"
"네."
둘이서 한참을 자료와 씨름하더니 잘못된 데이터를 겨우 찾아냈다. 자리로 돌아온 미소는 휴대폰에 떠 있는 메시지를 확인했다. 박대리였다.
- 그래. 옥상에서 기다릴게.
이거 언제 전송된 거지? 아차. 아까 일어나다가.
하~ 한준혁 때문에 되는 일이 없네.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어떻게 해야 할까 망설이더니 이내 메시지 한 통을 보냈다.
- 답이 늦었죠. 죄송해요. 대리님. 10분만 기다려 주실래요?
주먹을 불끈 쥔 미소가 립스틱을 손에 들었다. 까짓 거 고백하는 게 죄는 아니잖아. 해보자. 공미소! 결의에 찬 눈빛을 저 멀리서 매의 눈을 뜯고 지켜보고 있는 한 사람이 있었다. 그 눈빛을 눈치채지 못한 미소는 그 길로 옥상으로 향했다.
/
살랑이는 봄바람이 미소의 얼굴에 와닿았다.
'고백하기 딱 좋은 날씨네.'
옥상 난간 앞에 박대리가 서 있었다. 그의 뒤로 조용히 걸어가는데 기둥 때문에 보이지 않았던 수민이 옆에 서 있었다.
'하~둘이 같이 온 거야?'
한숨을 내쉰 미소는 애써 얼굴을 미소로 바꾸며 걸어갔다.
"대리님. 수민이도 있었네요."
"어. 그게 수민이가 같이 올라오자고 하더라고. 근데 무슨일로 보자고 한거야?"
"별거 아니에요. 다음에 말씀 드릴게요."
"그럼 온김에 나 다음 달에 이직해. 미소씨한테는 이야기했어야 했는데."
그래. 최소한 나한테는 말을 해줬어야지. 당신 내 사수였잖아. 서운한 마음이 들었지만 결정된 일을 번복할 수도 없는 일이니까.
"괜찮아요. 대리님. 그런데 수민이는 왜 같이."
"우리 둘이 사귀어."
"혹시 언제부터?"
"자기야. 우리 며칠 됐더라."
수민이 박대리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누가 봐도 사귄 지 얼마 안 된 연인의 모습이었다. 심장이 쿡 하고 조여왔다. 좋아한다는 말 한마디 못해봤는데.....
"대리님. 저 먼저 내려가 볼게요. 사무실에서 뵈요."
아랫입술을 꾹 문채 서둘러 옥상을 빠져나왔다.엘리베이터 앞에 한참을 서 있었다. 차마 내려가는 버튼을 누를 수가 없었다. 밝은 엘리베이터 안에 서면 더욱 초라해질 것만 같았다. 비상계단을 열고 투벅 투벅 내려갔다. 몇 층까지 왔을까? 그만 털썩 주저앉았다.
"그럴 거면서. 왜 잘해준 거냐고. 왜!"
참았던 눈물이 터져 나왔다. 한 번 터진 울음은 좀처럼 멈추질 않았다. 왜 이렇게 서러운 걸까? 그렇게 좋아했었나? 자신의 마음을 바보처럼 몰랐다. 이럴 줄 알았으면.
"초상 났습니까?"
초상이라니. 이게 무슨.
미소의 어깨너머로 하얀 손이 들어왔다. 이게 무슨.
"일은 안 하고 여기서 뭐 합니까. 공미소씨."
당신이 왜 거기서 나와?
"왜 여기 계세요?"
"일 안 하는 직원 잡으러 왔습니다. 추스르고 내려와요."
뚜벅뚜벅 계단을 밟으며 내려가는 구두 소리가 들렸다. 미소는 준혁의 손수건을 들고 더 크게 울었다. 하필 걸려도 저 인간한테. 서러움은 더없이 강하게 폭발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