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결혼 전시라는 특이한 방법으로 결혼식을 하기로 하고 갤러리 대관을 계약했다. 그때는 몰랐다. 전시 기획이 얼마나 힘들지. 우리는 전시 기획을 해본 적이 없었고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 이렇게 힘들 줄 알았다면 안 했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어떻게 준비했는지 이야기해보겠다.
전시 콘셉트 잡기
결혼식이지만 전시이기 때문에 콘셉트를 제대로 잡고, 전시를 처음부터 끝까지 봤을 때 주제를 느낄 수 있도록 하고 싶었다. 후보 콘셉트는 이런 것들이 있었다.
1. 여행
인생은 짧은 여행을 하다 가는 것. 여행 속에서 기쁜 일도, 힘든 일도 있겠지만 지나고 보면 좋은 추억이 되듯
여행 덕분에 인생을 즐겁게 살 수 있듯이 함께 여행한다는 느낌으로 즐겁게 같이 살고 싶다.
2. 게임
2인의 플레이어가 게임 스테이지를 깨면서 다음 스테이지로 넘어간다. 게임이 인생이랑 비슷하게 단계가 있고, 역경을 이겨내면 보상이 있고, 해피 엔딩을 맞이한다. 우리가 함께 게임하는 걸 좋아해서 생각했던 주제였다. 그런데 어르신들이 보기에는 게임을 잘 모르시고 부정적으로 보시는 분들도 계실 것 같았다.
3. 춤
it takes two이라는 유명한 2인용 게임이 있는데 it takes two to tango (탱고를 추기 위해서는 두 사람이 필요하다)라는 의미라고 한다. 나와 여자 친구가 결혼이라는 춤을 추며 함께 행복하게 살아간다.
4. 책, 음악 앨범
함께 인생이라는 책을 만든다. 책을 쓴다는 건 목차를 짜고 내용을 채우고, 꾸준히 써야만 하는 일이다. 기록하는 건 재밌고, 내 생각을, 내가 누군지 알 수 있다. 내가 누군지 알아가는 건 인생을 살아가는 과정이다. 결혼을 통해 우리는 자기가 누구인지 알아내는 인생의 목표에 한발 더 다가갈 수 있다.
5. Harmony(화음), 오케스트라
함께 화음을 내며 조화롭게 살아간다.
6. 공동 작업실
한 사람의 작업실이 두 사람분이 되어가는 이야기. 각자의 작업을 하던 사람들이 만나면 새로운 작업실이 생기고, 새로운 작업물도 생기지 않을까. 각자의 방, 같이 있는 방, 가족이 있는 방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재미있을 것 같다.
최종적으로 "여행"과 "공동 작업실" 둘 사이에서 고민했는데 요즘 여행 유튜버, 여행 예능이 많아서 사람들이 공감하기에 좋지 않을까 해서 여행을 주제로 정했다. 전시명은 "우리들의 여행", 영어로는 "Our Journey"로 지었다.
노션에 정리하기
모든 기획은 나와 아내가 함께 사용하는 노션 워크스페이스에 정리했다. 참고로 대학교 계정 사용하시면 노션을 무료로 쓸 수 있고, 둘이 공유해서도 쓸 수 있다. 노션을 잘 활용하여 효율을 높일 수 있었다.
레퍼런스 조사
수많은 레퍼런스를 조사했다.
이것 말고도 레퍼런스 정리한 게 꽤 많았다. 둘이서 함께 조사한 레퍼런스를 노션에 차곡차곡 정리했다. 전시를 검색해 보고, 예전에 갔었던 전시를 찾아보고, 핀터레스트도 찾아봤다.
메인 사이니지 작품 구상하기
작가님 한 분에게 작품을 요청할 수 있었다. 메인 사이니지 현수막으로 만들면 어떻겠냐고 대표님이 제안하여 작가님에 의뢰를 드렸다. 전시 주제가 “우리들의 여행”이니, 우주여행을 하는 모습이 신선하고, 여행의 끝판왕 느낌이어서 우주에서 여행하는 모습을 그려달라고 요청드렸다.
위의 그림을 스케치로 그렸고
chatgpt에게 그림 만들어 달라고 하니 이렇게 잘 만들어주었다. 이걸 토대로 작가님께 요청드렸고
최종적으로 이런 예쁜 그림을 받을 수 있었다! ㅎㅎ
전시 구성
전시를 어떤 구성으로 보여줄지 정했다. 전시 내용 중 '여행'에 대한 그림 및 글로 주제를 표현하고, 전시라는 방식의 결혼식을 낯설지 않게 왜 이렇게 준비했는지 소개하고 싶었다. 그리고 전에 갤러리 결혼식을 하셨던 분의 내용을 참고하여 과거/현재/미래 3파트로 나눠서 이야기를 만들었다.
Intro : 전시의 주제를 보여줄 메인 사이니지
과거 : 각자의 부모님, 가족 이야기, 연애하기 전의 이야기
현재 : 각자 어떤 사람인지 소개, 연애에 대한 이야기, 어떻게 만났는지, 어떤 점에서 서로 끌렸는지, 왜 갤러리 전시로 결혼식을 하게 되었는지
미래 : 결혼 후의 삶에 대한 이야기
가벽 배치 정하기
위의 배치도가 우리가 최종 결정한 가벽 배치도였다. 가벽은 말 그대로 가짜 벽인데, 기역자의 벽을 원하는 곳에 이동해서 설치할 수 있다.
과거, 현재, 미래 이렇게 총 3가지로 분류하였으니 사용할 수 있는 가벽의 1/3 씩을 각각 과거, 현재, 미래에 배치했다. 이렇게 배치하면 어떨까요 하고 갤러리에 보내 피드백을 받아 위의 배치로 최종 결정했다. 그런데 한 가지 놓쳤던 것이 있었는데, 모든 가벽을 쓸 필요는 없다는 걸 몰랐다. 우리는 아무 생각 없이 모든 가벽을 사용하는 방향으로 기획했고, 덕분에 엄청나게 많은 시간을 전시 준비에 써야 했다. (그만큼 더 많은 이야기를 전시를 통해 할 수 있었지만 힘들긴 했다. ㅎㅎ)
어떤 콘텐츠를 만들지 방법을 논의하는데 나와 아내의 의견이 달랐다. 나는 가벽의 배치도를 정하고, 각 가벽별로 어떤 콘텐츠를 만들지 기획하고 싶었고, 아내는 콘텐츠를 먼저 만든 뒤에 가벽에 배치하고 싶어 했다. 서로의 의견이 다를 때 협의하는 과정이 꽤 힘들었다.
첫 번째 기획안 빠꾸 먹다
기획을 다했는데 대략 7,000자 분량이 나오더라... 내용은 없이 어떤 걸 하겠다는 제목 초안만 한 건데. 총 64개의 벽면을 꾸밀 콘텐츠를 만들다 보니 양이 많았다. 게다가 레퍼런스들의 퀄리티도 너무 높았다.
위와 같은 레퍼런스들이 많았다. 그래서 설치를 위탁해 주시는 갤러리 대표님께 보내니 이건 절대 불가능한 수준이라며 최대한 단순하고 양을 줄여달라는 얘기를 들었다.
그런데 이럴 경우를 대비해 과거 파트만 초안을 만들어 보내드리며 이 분량으로 현재와 미래도 할 것 같은데 괜찮냐고 갤러리 대표님께 여쭤봤다. 그때 괜찮다고 해서 이렇게 작업한 건데.. 처음부터 그렇게 얘기해 줬으면 고생해서 만든 기획안을 다시 수정하는 일은 안 생겼을 텐데 아쉬웠다. 갤러리와 이런 트러블은 사실 끝까지 계속 있어서 힘들었다.
기획과 디자인을 대폭 줄인 2차 기획
대표님 말대로 글과 디자인들을 줄이기 시작했다. 한편 위탁 설치를 해주기로 했는데 소홀한 태도의 갤러리에 스트레스가 쌓였다. 계약할 때 어느 정도까지 설치, 디자인을 해주는지 협의를 하지 않았다. 그래서 제법 큰돈을 지불하고도 원하는 디자인으로 전시를 할 수 없는 것이 상실감이 컸다. 하지만 설치가 불가능하다고 하시니 줄일 수밖에 없었다.
과거, 현재, 미래의 intro 부분에 위와 같은 디자인으로 만들고 싶었다. "여행"이라는 전시 주제를 전시 전반적으로 표현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디자인적인 요소들이 꽤 있었다. 퀄리티 높은 그림을 우리가 그리기는 힘들었고, 외주를 맡기는 것도 시간과 비용이 들다 보니 포기하게 되었다.
그렇게 기획과 디자인을 대폭 줄여 2차 기획안을 드렸다. (디자인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그렇게 드리니 엑셀과 PPT로 정리해 주는 게 설치 작업하는 사람들에게 좋아서 그렇게 만들어달라고 하셨다. 아니 대표님 그럴 거면 처음부터 엑셀과 PPT로 만들어달라고 하셨어야죠ㅠㅠ
힘들었지만 화를 낸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었다. 그렇게 했던 내용을 다 엑셀과 PPT에 다시 옮겼다. 그리고 제목만 있었던 기획안에 내용을 채웠다.
스프레드시트, PPT, 사진 정리
PPT에는 각 가벽별로 어떤 제목이 들어가는지, 어떤 사진이 들어가는지, 사진, 캡션의 위치는 어떤지 표시했다. 이런 식으로 총 32장을 만들었다. 양이 엄청 많았다.
스프레드시트에는 가벽 번호, 종류(통시트지인지, 캡션인지), 사진 파일명, 사진 크기, 사진 형태, 내용, 시트지 내용, 캡션 내용으로 정리했다. 이렇게 141행까지 내용이 꽉꽉 차있다... 이 내용 준비하느라 몇 달 동안 퇴근하고, 주말에도 열심히 내용을 썼다.
사진 파일도 파일명으로 정리했다. 약 50장의 사진이 있었다.
이외의 기획들
- 전시 한 켠에 전시를 준비하는 모습, NG 컷 사진을 비하인드 컷으로 전시
- 전시를 어떻게 구경하면 되는지 설명해 주는 작은 전시 팸플릿 비치
- 부케를 신부만 받는 것이 아니라 하객 모두가 받을 수 있도록 DP 한 꽃을 포장해 갈 수 있고, 쓰레기를 줄이는 플라워 바
- 정말 맛있는 비건 케이터링
- 우리가 만든 캐릭터 그림이 있는 떡메모지로 작성하는 방명록
- 여행이라는 주제에 맞게 우리가 했던 여행을 담은 영상을 재생 (무려 6시간 분량!)
정말 힘들었던 결혼식 전시 기획
결론적으로 전시 기획은 정말 힘들었다. 나와 아내가 함께 통과해야만 졸업할 수 있는 졸업 프로젝트를 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모든 가벽을 쓰다 보니 총 64면을 기획하고, 내용을 채워야 해서 준비해야 할 양이 많았다. 아내와 어떻게 기획을 할지부터 수많은 다른 의견을 협의하는 과정이 쉽지 않았고, 갤러리의 느린 소통과 적극적으로 전시 기획을 가이드해주지 않은 점, 전시 설치에 대한 생각이 서로 달랐던 점 등으로 결혼식 전날까지 정말 힘들었다.
그렇지만 힘들게 준비한 만큼 결혼식의 내용은 풍성했고 멀리서 보러 오신 하객 분들에게도 좋은 반응을 얻을 수 있었다. 난생처음 갤러리 결혼식을 한 이야기로 인터넷 기사와 라디오 인터뷰를 받아보기도 했다. 대표님도 전시 설치 해야 할 양이 너무 많아서 고생이 많으셨다. 아마 양이 너무 많았는데 결혼식이라는 중요한 행사이기 때문에 무리해서 하신 것 같았다. (앞으로는 전시 위탁 안 하실 거라고.. 우리가 마지막이라고 ㅎㅎ ㅠㅠ)
덕분에 우리만의 갤러리 결혼식과 결혼 전시라는 힘들었지만 좋은 추억을 만들 수 있었다. 다음 편에 결혼식의 모습 이야기 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