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고질병이었던 디스크는 결국 수술을 해야 했다. 허리 수술을 하고 병원에서 누워만 있던 엄마가 몇 주 만에 퇴원하던 날이었다. 그날은 기쁜 마음으로 퇴원을 기념하며 우리 동네에서 유명했던 치킨을 시켰었다. 살이 많이 빠진 듯 보이는 내 모습에 엄마는 집에 오자마자 맛있는 걸 사주고 싶어 했다. 부드러운 순살과 깨, 카레가루가 버무려진 튀김옷이 유독 바삭바삭하게 튀겨져 많이 먹어도 쉽게 질리지 않던 맛의 동네 치킨이었다. 병원에서 퇴원해 오랜만에 엄마와 가족이 집에서 마주하고 있었던 날이었기에 모두 기분이 좋아 나는 생각보다 과식을 했었다.
그때까지는 마냥 오랜만에 엄마를 봐서 행복하고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나는 어딘지 모르게 어딘가가 아파왔고, 단순히 체한 거라 생각했던 것과 달리 하루가 다르게 점점 더 더부룩하고 아파오는 배를 부여잡고 뒹굴며 삼일만 병원 응급실에 실려 갔다. 동네에서 가장 큰 응급실이지만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결국 원래 다니던 병원이 있다면 그쪽으로 가라는 말에 서울대 병원까지 가야 했다. 하지만 링거를 꼽고 가지 않으면 위험하다고 하면서도 구급차는 지역 한정으로 운영되어 지역 밖으로 이동이 불가하다고 말했다. 일반 자동차로는 링거를 꼽고 갈 수 없다는 말에 사설 구급차를 불러서 서울로 향했다. 실려 가는 환자는 아파서 죽네, 사네 하는 통에도 사설 구급차는 사이렌을 울리는 대신 정 속도 유지와 신호를 다 지키면서 가는 바람에 평소 병원에 가는 시간보다 훨씬 더 오랜 시간이 걸려서 병원에 도착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도착한다고 병원에서 나를 바로 봐주는 게 아니었다.
대학병원의 응급실에는 언제나 사람이 넘쳐났고, 그중에 나도 대기환자로 오랜 시간 차가운 복도 간의 침대에 누워 기다린 끝에 의사 선생님의 말을 들을 수 있게 되었다. 나의 몸속 문제는 정상 범위보다 급격한 과다 칼슘 생성이라고 말하였다. 나는 늘 칼슘이 부족했던 병을 안고 살았는데 갑작스러운 과다 칼슘이라는 말에 가족 모두가 어안이 벙벙했다고 한다. 칼슘 수치가 높아지면 처음은 단순하게 체한 듯 한 현상을 보인 것이라고 했다. 칼슘 높아질수록 가스 배출부터 배변 활동에도 문제가 생기고 장이 뒤틀리는 고통과 함께 나처럼 쇼크가 와서 최악의 경우 사망에 이를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나 역시 쇼크가 온 상태였기에 사망 사인까지 한 상태로 중환자실로 옮겨져 집중 치료를 받아야 했다.
그 해 겨울은 무척이나 추웠고, 그만큼 눈도 많이 오고 집들 동파 사고도 끝없이 발생하던 시기였다. 언니는 서울에서 자취를 했고, 동생은 방학 전이였으므로 우리가 지내는 지역에서 학교를 계속 다녀야 했다. 엄마, 아빠가 번갈아 가며 내려가서 동생을 봐주고 나에게 다시 오기를 반복했다. 학교 때문에 엄마, 아빠를 따라 내려오지 못한 동생은 학교 방학을 한 후에 꽃순이와 꽃순이 물통이며 밥그릇 등 한 짐을 짊어지고 고속버스를 타고 올라와 언니를 만나 언니의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가장 춥고 눈이 많이 오던 날 시골에서 연락이 왔다. 집에 동파가 된 거 같으니 내려와야 한다는 전화였다.
엄마 아빠는 중환자실 면회가 끝난 저녁 부랴부랴 고속버스를 타고 집에 내려가서 동파된 수도관을 고치느라 애를 먹었다고 한다. 이게 불과 엄마 허리 수술을 한지 한 달도 안 돼서 발생한 일이었기에 그때 엄마는 무척 힘들었다고 했다. 다행히 나는 투석을 하면서 피가 정상 수치 범위로 돌아올 수 있었다. 몸이 괜찮아지기 시작하니 주위에 일어나는 일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조용할 것 같은 병원 중환자실 안에서도 많은 일들은 일어난다.
삐뽀삐뽀하는 소리는 응당 응급차가 들어올 때만 들리는 소리가 아니었다.
중환자실에 누워있다 보면 하루에도 수 십 번씩 저런 소리가 들리는데 그럴 때면 간호사와 의사 선생님들이 우르르 소리 나는 곳으로 달려간다. 다들 빠르게 환자를 에워싸고 상태를 확인하며 환자를 보는데도 모두가 사는 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하루는 그렇게 몰렸던 의사 선생님들과 간호사 선생님들이 기운 없이 돌아서면 그날은 중환자실에서 누군가가 숨을 거두고 떠난 것이고, 그런 소리가 없이 기계의 단조로움만 있을 때면 참으로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가끔은 중환자실에 괴짜 의사 선생님들도 오곤 한다.
나에게 와서 대뜸 “치석 좀 떼어가도 되겠니?”라고 물으셨던 머리가 희끗한 의사 선생님이 있었다. 당시 나이는 성인이었지만 성인 표준 체중에 현저하게 미달이었던 나는 소아과에서 진료를 받고 있었다. 중환자실 역시 어린이 병동 소속의 중환자실이었다. 의사 선생님은 자신의 논문에 꼭 필요한 부분인데 어린이 병동 중환자실에는 이가 자란 아이가 별로 없다고 말했다. 꼭 필요하다는 말과 함께 며칠 째 양치를 하지 못하고 있던 내 입 안으로 치석을 떼기 위한 차가운 얇게 젓가락같이 생긴 쇠막대기가 들어왔다. 치과에서 경험한 차가운 금속이 이를 긁는 느낌은 썩 유쾌하지는 않았다. 치석을 떼어 가는 그분의 얼굴에는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쳐져 있었다. 당황스러웠지만 중환자실은 무료했고, 이런 일마저 없었다면 시간은 더욱 더디게 갔을 것이다. 누군가에는 삶의 마지막 길이 누군가에게는 삶의 터전이고, 미래를 위한 가치 있는 공간이 되기도 한다.
눈이 많이 오던 어떤 날은 여자 의사 선생님이 들어와 “밖에 눈이 많이 와요! 봐볼래요?”하며 카메라로 찍어 눈 내리는 병원을 보여주며 자신의 연애담을 들려주기도 했다. 병동이 어린이 병동이기에 어린이들만 상대하는 분들이지만 나를 성인으로 대해 주시는 분들도 있었다. 연애담의 끝에는 사랑해야 되는 일이 많으니 건강하게 나가자는 말이었다. 누군가는 죽어서 나가야 하는 그 길을 나는 다행스럽게도 살아서 엄마, 아빠 손을 마주 잡고 나올 수 있었다. 일반병실로 내려온 나는 허리 수술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픈 엄마 대신 아빠와 함께 퇴원하는 날까지 보내며 소복하게 눈이 쌓인 병원을 뒤로하고 퇴원을 했다. 엄마는 아직까지도 이때의 나의 쇼크의 원인은 다 치킨 때문이라고 생각한다며 그 브랜드의 치킨을 사 먹지 않고 계신다. 맛있는 걸 잃어버릴 수 있는 건 살면서 한순간이기에 언제나 몸조심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