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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텔라 Oct 19. 2022

시선 즐기기

어느 날 우리 집에 손님이 찾아왔다. 엄마에게 물건을 전해주러 오셨는데 하필이면 엄마가 집에 계시지 않아 내가 받게 되었다. 손님 옆에는 방학이라 학교에 가지 않았던 꼬마 손님도 함께 찾아왔다. 집안에 엄마가 없는 상황이라 현관문을 열어드리기 위해 벽에 기대 현관을 열었다. 문 앞에서 물건만 전해주시고 돌아서는 손님과 아이가 문을 등지도 가는 모습을 확인한 후 나는 문을 닫았다. 문이 닫히는 소리와 동시에 문 밖으로 또랑또랑한 아이의 음성이 들려왔다. 


“엄마, 저 누나 다리는 왜 저래?” 

수술 후 한쪽만 짧아진 다리가 공중에 떠 있는 모습이 아이의 눈에는 낯설었던 모양이었다. 회색 현관문이 우리를 가로막고 있는 게 다행스러웠다. 나는 그 순간 아이를 마주하고 있었다면 어떠한 반응을 보이지 못했을 거 같다. 아이들은 양날의 칼날처럼 순수함 뒤에는 숨은 잔인함이 있었다. 황급히 “그런 말 하면 못써, 이모가 아픈 거야.”라고 말하는 소리가 뒤따라 들려왔다. 천진한 아이들의 시선 앞에서는 옷을 적나라하게 발가벗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감추고 싶던 부분들이 아이들을 만나면 여지없이 드러났다. 그래서 나는 아이들이 싫었다. 나를 당황스럽게 만드는 아이들의 천진함이 무서웠다.


“어른이에요? 아이예요?”


종종 외출을 할 때면 아이들은 신기한 듯 자신과 눈높이가 맞는 나에게 다가와 짓궂게 물어오는 아이들.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면서 지내왔지만 대놓고 보거나 힐끗거리는 시선을 애써 모른 척 넘겨보아도 낯선 사람들의 시선이 나에게 닿는 건 언제나 불편했다. 특히 세상을 바라보는 거짓 없는 눈을 가진 아이들은 타인에 대한 배려보다는 자신의 호기심을 해결하고자 하는 욕구가 강했다. 아이들 앞에서는 나 자신이 나는 부끄러웠다. 아이들의 악의 없는 순수한 물음에 제대로 대답해 준 적은 한 번도 없다. 아이들에게 어떠한 대답을 해주기엔 내가 너무 작았기 때문이다. 나는 내 스스로를 부끄럽게 여기고 있었다.


 사람들의 시선은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악의도 호의도 없다. 단순히 보지 못했던 낯선 사람에 대한 궁금증, 신기함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의 차지하는 감정일 것이다. 그 안에는 가끔 동정도 있고 불쾌감도 섞여있다는 걸 굳이 말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다. 사람은 자신에게 닿는 시선만으로도 상대의 감정을 읽을 수도 있었다. 지금보다 더 내성적이었던 어릴 적에는 그 시선이 부끄러워 자꾸 어둠 속으로 숨어버리려고 했던 적도 있었다. 숨으려는 나를 이끌어 내는 건 역시 가족이었다. 어릴 적에 동생의 일기장을 우연히 본 적이 있다. 안에는 동생이 왕따를 당하고 있고, 왕따를 당하는 이유가 간략하게 적어져 있었다.


[xx가 언니가 장애인이라고 왕따를 시킨다.]


동생을 왕따 시킨다는 아이는 나도 잘 알고 있는 아이였다. 우리 집에도 종종 왔고, 동생이랑 제법 친했던 아이였다. 내가 몸이 불편해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준 적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우리 가족에게는 많은 피해를 주고 있었다. 내 장애가 동생에게 상처를 준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동생의 일기를 본 내색을 한 적은 없었다. 동생은 내가 그런 내용의 일기를 본지도 모르고 부모님은 동생의 일기장에 이러한 내용이 있는지도 모른다. 나만 아는 비밀인 셈이다. 동생은 오히려 자신을 왕따 시킨 아이를 무시하며 힘든 시기를 잘 보냈다. 늘 나와 다닐 때도 아는 사람과 마주쳐도 창피해하지 않고 자신보다 작은 나를 언니라며 언제나 당당하게 말했다.


 나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가족들의 모습에 오히려 나를 부끄러워하는 내 자신에 대한 반성을 하게 되었다. 아닌 걸 알지만 한번 의식되기 시작한 시선은 모든 사람들이 나만 보고 있는 기분을 들게 해 무서웠던 시선도 이제는 의연하게 모른 척하는 법도 배워가고 있다. 막상 생각해보면 사람들의 시선이 나에게 닿는 건 길어봐야 3초 이내 남에게 신경을 쓰기엔 우린 바쁜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그마저도 나에게 관심이 있어서가 아닌 주위에 있기에 어쩔 수 없이 닿는 시선일 때가 많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생각보다 세상 사람들은 날 의식하지 않았다. 내가 그 사람들을 의식할 뿐. 




나에게 닿는 시선에 내가 부끄러워할 때에는 사람들이 나를 부끄럽게 보는 거 같지만 지금처럼 당당하게 나를 보이면 오히려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게 나를 바라본다. 결국 그 사람의 시선을 결정하는 건 내 마음이 결정하는 일이었다. 눈을 피하지 말고 마주하자, 아픈 건 부끄러운 게 아니다. 당당해지자. 나는 오늘도 선택적 관종이 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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