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 보면 그런 날이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 좋았던 날이 갑자기 시간 낭비라는 생각이 들 때. 아무것도 할 건 없지만 일단 밖으로 나가본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이 보이는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아 좋아하는 카라멜마끼야또 마시며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수첩을 괜히 뒤적거리게 된다. 그냥 밖에 나와서 무엇을 하고 있다는 것 자체에 위안을 받는다.
계획된 여행이 아닌 갑작스럽게 떠나는 여행을 우리 가족은 곧잘 했다. 아빠가 일이 끝나는 저녁, 우리 가족은 그날 밤에 출발하여 밤새 달려 동해 바다에 도착한다. 늦은 새벽 바닷가에 도착해 어둠 속에서 철썩 거리는 파도소리를 듣고, 바닷가 근처 주차장에서 아침을 기다리는 그런 소소하고 갑작스러운 여행.
여행을 가서 꼭 무엇을 하거나 맛있는 걸 먹고 오기보다 그냥 함께 있어서 작은 일에도 즐거운 그런 시간을 보냈다. 거창한 해외여행은 아니었지만 나는 그 순간이 행복했다. 지금은 서로 시간도 없고, 그때처럼 밤새 떠나는 여행은 피곤해서 못할 거 같다고 한다.
이제는 계획이 없는 여행보다 계획된 여행을 좋아하게 된 것인가? 아니. 좋아하기보다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행복했던 전과 달리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의미 없는 시간이 초조해진 거다. 일분, 일초의 시간조차 경쟁력이 되어가는 요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의미가 부여되지 않은 시간은 말 그대로 삶에 의미 없는 시간이 되어버렸다.
파란 하늘을 수놓는 움직이는 하얀 구름, 쉼 없이 철썩이는 파도, 바람에 휘날리는 모래알.
어느 것 하나 바쁘지 않은 것이 없다. 눈길이 닿는 모든 것은 바쁘게 움직이고 그 중심엔 내가 있었다.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하여 의미 없는 시간이 아니었다. 나만큼이나 바빴지만 늘 무엇을 하고 있어서 눈치 채지 못한 풍경이 보이고, 시간이 흐르는 대로 자연스럽게 변하는 풍경에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지난날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행복할 수 있었던 건 내일을 걱정하는 오늘의 내가 없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늘 무엇을 하는 게 익숙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여행이 낯선 이들은 이런 시간이 인생 낭비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의 인생에 낭비는 없다고 생각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여행에서 나는 행복을 느꼈고, 함께하는 즐거움을 배웠다. 의미를 가득 담은 여행을 떠나 사소한 일에도 가득 동기를 부여하여 억지로 만들어내는 무거운 의미로 고단해지기보단 아무것도 하지 않고 주위를 바라보며 마음에 쉼을 주는 여행으로 과부하 걸린 마음에 여유를 챙기는 여행은 되돌아보면 인생의 고작 며칠이라는 시간이지만 기억에 오래 남고, 소중한 시간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