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까지 오래된 연립주택, 세워진지 벌써 30년 된 건물 1층에 살았다. 처음 다리를 다치고 나서 퇴원 후 제대로 움직일 수 없는 나 때문에 급하게 이사했던 곳에 우리 가족은 여전히 살고 있다. 횟수가 지날수록 집은 낡아졌고, 작았던 아이들이 자라면서 집의 공간은 처음 이사 왔을 때와 똑같지만 상대적으로 작아지고 있었다. 언니와 동생이 하나, 둘 다른 곳에서 자취를 시작하며 자리를 옮기니 집에는 엄마와 아빠, 그리고 나만이 남아 있는 공간이 되었다.
나는 아직도 처음 이사 올 때의 집안 풍경이 어제 일처럼 기억이 난다. 가구가 들어오지 않아 썰렁할 법도 한 널찍한 공간이 무색할 정도로 거실 창을 통해 온 집안을 밝혀주는 눈부신 햇살이 참으로 따뜻했다. 내가 기억하는 우리 집은 따사로운 오후 햇살 그 자체였다. 지금은 바로 앞에 큰 건물이 들어서면서 하루 종일 들어오던 햇빛이 오전에 잠깐 비추고, 널찍했던 공간에는 세월이 묻어나는 살림살이가 자리 잡고 있다.
집에서 나가려면 네 개의 계단을 내려가야 한다. 옛날 건물치곤 계단의 높이가 높지 않은 편이었다. 하지만 건물의 나이만큼이나 빠르게 나이를 먹던 꽃순이는 눈이 급격하게 나빠지면서 작은 계단 네 개를 내려가지 못해 나와 집 앞 주차장 언저리를 산책하는 일상이 사라졌었다. 그 무렵부터 우리가 함께 무언가를 할 수 있는 것들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하나씩 줄어들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강아지의 짧은 생은 주인으로서 속상한 일이었다. 낮은 계단 네 개, 아래로는 나와 별개의 세상이 펼쳐지는 거 같았다. 계단을 지나 몇 걸음 옮기면 나오는 달콤한 향이 물씬 풍기는 과일가게, 옆으로는 없는 거 말고는 다 있다는 동네 슈퍼마켓, 예전에는 사람들 발길이 많이 닿았던 작은 시장. 이곳에서 살아온지 많은 시간이 지나왔지만 나는 아직도 그곳들을 가보지 못했다. 차를 타고 지나가는 길 스치듯 지나가는 게 전부였던 계단 아래의 세상은 나에게 가깝고도 먼 곳이다.
고작 네 개의 계단도 쉽사리 내려가지 못했던 내가 더 높고, 많은 계단을 밟은 날이 있었다. 우리 가족은 새해가 되는 날이면 항상 하는 행사 같은 우리 집만의 의식이 있다. 해돋이를 보기 위해 매년 바다로 가는 것이다. 주로 먼바다, 내가 좋아하는 동해 바다를 간다. 여의치 않다면 가까운 근처 바닷가라도 새해 첫날에 꼭 가곤 했다. 캠핑도구를 챙겨가 새로운 해를 맞이하는 붉은 해가 떠오르기 전에 찬바람을 맞으며 끓여먹는 라면이 매년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심지어 나는 라면을 좋아하지 않지만, 그날만큼은 아빠가 끓여주시는 라면은 꼭 먹었다. 일 년 중 라면 먹는 날을 손꼽아 셀 수 있는데 새해가 바로 그런 날 중 한 번을 차지하는 날이다. 집에서 먹는 라면은 야외에서 먹던 라면의 맛이 나지 않아 잘 먹게 되지 않는다. 거창하진 않지만 쉽게 먹을 수 없는 특별한 새해가 주는 만찬인 셈이었다. 그만큼 새해는 나에게 기다려지는 날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날들이 계속 지속되기에는 일 년 사이, 반년 사이, 한 달…하루 단위로 변해가는 세상 속에서 힘든 일이었다.
언제부터, 누가 말했는지 모르겠지만 예로부터 내려오는 말 중에 이런 말이 있다. <오랜 병에 효자 없다.> 그만큼 가족 중 환자가 있다면 부모, 자식도 지치기 마련이다. 육체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힘듦을 느끼게 된다. 우리 집도 예외는 아니었다. 늘어나는 빚을 감당할 수 없어 엄마가 정식으로 일자리를 구하게 되었다. 엄마의 일은 연휴가 없는 일자리였다. 엄마의 쉬는 날은 내가 병원을 방문하는 ‘목요일’에 한정되어 있어서 엄마의 쉬는 날은 병원 가는 날이 되었다. 쉼이 필요한 시기가 찾아왔다.
엄마의 일이 시작하고 나서부터는 당연하게 생각하던 매년 하던 새해맞이를 하지 못하게 되었다. 늘 기다리던 날이 사라지는 건 나에겐 무척 아쉬운 일이었다. 어느 순간 북적거리던 12월의 마지막 날은 평범한 하루와 다르지 않은 그저 그런 하루가 되었다. 피곤함에 일찍 잠드시는 부모님과 성인이 되어 각자 다른 곳에서 친구들과 보내는 언니와 동생까지. 어느새 우리는 함께 하는 시간만큼 중요한 일상이 각자에게 생겨 있었다. 그렇게 나는 밤늦게까지 시끄럽고 반짝이는 화면으로 가득한 TV를 통해 제야의 종을 듣고, 시작되는 새해를 몇 년째 혼자 맞이하게 되었다.
조용히 맞이하는 새해의 이른 아침이 밝아오고 있다. 혼자 떠들던 TV가 꺼진 집안은 고요하게 새해 첫 아침을 맞이할 준비를 한다. 방에서 얼핏 보이는 창밖으로 어느덧 밝아지는 하늘이 보였다. 어둠이 가려졌던 세상의 윤곽이 서서히 드러났다. 기상청에서는 서해안에 새해 첫 일출이 떠오르는 시간은 오전 7시 48분이라 말했다. 동해보다는 무려 20분가량이 늦은 시간이었다. 같은 나라인데도 해가 떠오르는 시간이 그렇게 차이 난다는 게 신기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하늘이 더욱 밝아지고 옆집이 또렷하게 보였다. 기상청 예보대로라면 아직 일출이 떠오르려면 멀었다. 어차피 집안에서 계속 창밖을 본다고 한들 옆집에 가려진 하늘에서 일출을 볼 수 없을 것이다. 점점 다가오는 새해 일출을 기다리는 그 순간 아주 떨리는 마음으로 대단히도 커다란 결심을 했다.
<옥상까지 올라가 보기>
연립 주택이었던 우리 집 꼭대기에는 공동으로 사용하는 옥상이 있다. 1층이었던 우리 집에서 옥상을 이용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가끔 해가 좋은 가을이 올 때면 엄마가 무말랭이를 만들기 위해 토막토막 가지런히 잘린 무를 말릴 때 말고는 없다. 나에게는 미지의 세계 이상으로 상상 속에서 듣기만 했던 공간이었다. 스스로 오르고 내릴 수 있던 계단은 고작 일층에서 땅으로 내려가는 네 개의 계단이 전부였다. 목발을 사용하여 평평한 땅을 짚는 것도 어려운 일인데 수많은 계단을 지나 옥상까지 갈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자꾸 드는 걱정과 달리 권태로운 지난날들과 다른 달력의 새로운 첫 장을 장식할 생각에 의욕은 넘쳐났다. 추운 바람을 막아줄 겉옷을 단단히 입었지만, 움직임이 둔하면 안 되므로 최대한 가볍고 얇은 옷을 입었다. 새해가 되면 사람들은 항상 새로운 계획을 짜고, 새로운 목표를 만들었다. 올해도 열심히 살아보자, 라는 마음이 가득 담긴 목표가 세워진다. 오죽하면 새해 첫 달의 가장 판매율 좋은 도서는 언제나 그간 많은 사람들이 목표로 생각하는 영어 독학 서적과 외국어 서적, 다이어트 관련 서적들이라고 한다. 나 또한 그런 마음가짐으로 집을 나섰다. 거창하게 집을 나섰지만 실상 내가 발을 내디뎌야 하는 곳은 바로 집 위로 향하는 길이었다.
계단 위로 조심스럽게 발을 내디뎠다.
나의 중심은 몸을 양쪽에서 지탱해주는 두 개의 목발과 하나의 발이었다. 어쩌면 남들보다 나를 지탱해주는 무언가가 하나가 더 있는 셈이니 심적으로는 덜 위험하다 느껴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 어쨌든 나는 올라간다. 더 높은 곳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 생각보다 훨씬 빨리 꺼지는 센서 등이 아직 일층의 반도 오르지 못한 시점에서 불이 꺼져버렸다. 밖이 환해지고 있어도 발이 내디뎌져 있는 이 공간은 동떨어진 다른 공간처럼 어두웠다. 발밑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옅게 들어오는 빛으로 공간을 확인하고 최대한 감각을 살려 목발을 내려놓고 몸을 띄웠다. 그러면 한 계단을 오를 수 있다.
목발을 사용하면서 알게 된 사실이 있다면 목발에 능숙한 사람들은 바닥을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람이 발을 올리면 자연스럽게 밑을 보지 않아도 넘어지지 않고 발을 내딛는 것처럼 목발도 자연스럽게 위치를 찾아 내디뎌진다. 나로서는 아직 어려운 일이었다. 일일이 바닥을 확인하면서 목발의 위치를 보아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헛손질이 곧 넘어짐으로 이어지는 대형사고이기 때문에 한 걸음, 한 걸음이 조심스러웠다.
새로운 센서가 시작되는 이층에 도착하였다. 드디어 좁은 계단에서 벗어나 조금은 넓어진 공간에서 안도의 숨을 고를 수 있었다. 계단을 오르면서 그동안 네 개의 계단을 오를 땐 몰랐던 사실을 알았다. 계단을 올라가는 도중에 내려가고 싶어도 방향을 바꿔서 내려갈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목발을 떼면 중심을 잃었고, 목발을 짚은 채로는 몸을 뒤돌려 설 공간이 없어 곧바로 뒤돌아 내려갈 수가 없었다. 계단 위에 선 나에게는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선택지밖에 남지 않았다.
사람이 올라가면 저절로 띵, 하고 불을 밝혀주는 센서가 어쩐 일인지 나를 인식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2층에 멈춰서 있어도 불이 켜지지 않았다. 밖은 처음 계단을 오르기 전보다 훨씬 더 밝아졌다. 서두르지 않으면 일출도 보지 못할 거 같아 마음이 급해졌다. 마음을 다잡고 다시 부지런히 계단을 오르기 위해 움직였다. 일상적으로 오르락내리락하는 계단이 나에게는 히말라야 산맥을 등반하는 것만큼 드높게 다가왔다. 어째서 계단은 오르면 오를수록 높이가 더 가파르고 폭이 좁아지는지 모르겠다. 문득 꼭대기 층인 3층에 살고 계신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대단하게 느껴졌다. 매일 같이 새벽 4시 30분에 높은 계단을 내려와 교회를 나가시고 6시 즈음이 돼서 예배를 마치고 다시 계단을 오르시는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머릿속 그림에서 할머니가 밟고 오르는 계단을 내가 함께 밟고 오르고 있었다.
고르지 못한 계단의 높이 덕분에 오르는 과정은 더욱 힘겨워졌다. 우리나라 건축법에 의문이 들 무렵 무사히 3층에 도착했다. 할머니가 내려오실 때 현관문 안으로 들려오던 고르지 못한 숨소리가 오늘은 할머니 집 앞에서 내 입을 통해 나오고 있었다. 가파른 계단을 마침내 모두 밟고 올라와 묵직한 옥상 문을 열었을 때 탁 트인 하늘이 나에게 쏟아졌다.
늘 올려다보던 옥상 끝자락과 수평선이 되어 마주할 수 있었다. 올라오는 동안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아직 일출이 떠오르기 5분 남짓 남아 있었다. 고소 공포증이 심한 나는 난간과 최대한 떨어진 옥상 중심에 조심스레 엉덩이를 붙였다. 갑작스레 높아진 눈높이에 심장이 요란스럽게 쿵쾅거렸다. 계단 위로 올라섰다는 사실만으로 큰 건물이 없는 우리 동네가 한눈에 들어왔다. 훨씬 넓을 거라 생각했던 계단 아래의 세상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작았다. 나는 왜 이토록 작은 세상에 발을 내딛는 걸 무서워했던 걸까.
나도 계단을 오를 수 있는 사람이었다. 네 개의 계단보다 더 높고 많은 계단을 딛고 올라왔다. 두려움에 2층에서 다시 되돌아 내려갔다면 오늘의 나는 아직도 권태로운 일상에서 세상을 등지고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계단 몇 개를 딛고 오름으로써 상상하지 못한 공간에 내가 중심이 되어 있었다. 멀게만 느껴졌던 세상이 작은 엽서의 사진처럼 나의 두 눈에 담겼다.
이날 나는 안타깝게도 떠오르는 일출은 보지 못했다. 하늘은 이미 푸른색을 지나 밝아졌지만 붉은 태양은 끝끝내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다. SNS에도 일출을 본 사람들의 붉은 일출 사진들과 새해 소망이 담긴 글들이 속속히 올라오고 있었다. 일출을 보고 다짐하고 싶었던 그해 나의 소망은 한걸음 나아가기였다. 새해 첫 태양을 보지 못한 아쉬움을 뒤로하고 집으로 내려가는 길은 올라올 때보다 더욱 무서웠다. 높은 계단을 오르는 것보다 내려오는 것이 더 쉬울 거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가파르고 높았던 계단은 내려가기 위해 목발을 짚으면 앞으로 쏠리면서 중심을 잃고 넘어질 것만 같았다. 덜컥 겁이 나는 순간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계단 위에서 움직여야 했다. 계단에 선 후에는 올라가거나, 내려가거나. 무섭다고 쉽게 뒤돌아갈 수 없었다. 네 개의 계단을 넘어선 세상은 모든 게 어렵다는 걸 나는 알고 있다. 올라 갈수록 불규칙했던 우리 연립주택 계단들처럼 앞으로 내가 나아가야 할 계단 아래 세상에도 불규칙한 일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계단이 높든, 낮든 나는 더 넓은 세상을 바라보기 위해서 나아갈 것이다.